트라우마가 남긴 기억의 흔적, 해리와 이인화
정신의학신문 | 이슬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트라우마 사건을 겪은 생존자들.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 일과 관련된 행동이나 감정, 감각을 계속 반복해서 경험하는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정신적 외상을 입은 사람들은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축소해서 기억하고, 또 다른 부분은 너무 과도하게 기억하는 특징을 보이기도 합니다. 간혹 트라우마 사건을 기억 속에서 지운 듯,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못하는 기억 상실을 나타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트라우마 스트레스에 관한 심층적인 연구와 분석을 했던 프랑스 심리학자 피에르 자네Píerre Janet는 자신의 환자 중 어머니의 죽음으로 심리적인 충격을 받고 입원하게 된 이렌이라는 젊은 여성의 사례를 통해 트라우마 사건이 우리의 기억에 어떠한 흔적을 남길 수 있는지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렌은 아픈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면서도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돈벌이까지 도맡아했습니다. 그렇게 수개월 넘게 어머니의 치료를 위해 모든 걸 다 쏟아부었지만 결국 어머니는 숨을 거두었고, 이렌은 큰 정신적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장례식 내내 큰소리로 웃기까지 한 이렌은 몇 주 뒤 병원에서 담당 의사인 자네의 진료를 받았는데,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특이한 점은, 이렌이 아무도 없는 병상을 멍하니 응시하면서 누군가를 간호하는 행동을 간헐적으로 했다는 겁니다. 그녀의 의식적인 기억 속에는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지워져 있었지만, 무의식적인 행동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죠.
자네는 수개월에 걸쳐 이렌에게 최면요법을 실시해 그녀를 치료했고, 어느 날 이렌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는 당시의 기억은 물론 감정까지 생생하게 끄집어냈다고 합니다.
자네는 이렌과 같이 트라우마 사건을 겪은 생존자들이 트라우마 기억을 저장하거나 처리하는 방식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기억들이 뉴런에 저장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기억 시스템에 다양한 방식을 통해 왜곡되거나 변경되면서 전체성으로 통합되는 것과 달리, 트라우마 기억은 당시 상황에 압도당한 정서적 경험으로 인해 조각난 기억들이 전체성으로 통합되지 못한 채 저장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이러한 임상적 경험들을 토대로 환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서로 분리되고 동떨어진 기억들을 ‘해리(dissociation)’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설명했습니다.
또 트라우마 생존자들의 뇌 영상을 촬영하면 대부분 섬엽에서 비정상적인 활성이 발견됩니다. 섬엽은 근육과 관절, 균형 시스템을 비롯한 내부 장기를 통해 우리 몸에 유입되는 정보를 통합하고 해석하여 체현 감각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트라우마 생존자들의 경우, 이런 섬엽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신체 감각에 제대로 접촉하거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생생하게 느끼는 데도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마치 내가 나 자신이 아닌, 다른 그 누군가가 되어 버린 것처럼 괴로워하거나 이 세상과는 분리되고 고립된 존재라는 이질감에 혼란스러워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자신과 동떨어져 있다고 느끼거나 자기 신체로부터 단절된 느낌을 자주 받는 증상을 ‘이인화(depersonalization)’라고 합니다. 트라우마 생존자들이 보일 수 있는 증상 중 하나이며, 특히 어린아이가 정신적 외상을 입을 경우 이 부분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조각난 기억의 파편처럼 손상된 자기 정체감과 잃어버린 통제력을 되찾기 위해 트라우마 생존자들은 다시 자신의 몸과 접촉하고 신체 리듬을 일깨우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의식이 몸과 분리되어 숨어들지 않도록 역으로 몸의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죠. 그러한 일환으로 마사지나 요가 등이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많은 정신질환 치료가 그렇듯 트라우마 생존자를 치료하는 매뉴얼화 된 치료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문가의 역량이나 지식수준, 임상 경험, 트라우마 사건이 생존자에게 입힌 치명상 정도 등에 따라 치료적 접근이 달라질 것입니다. 다만, 그동안 서구 사회가 약물과 면담치료, 인지행동치료 등의 접근이 활발했던 데 비해 마음챙김과 리듬 활동, 요가나 뉴로피드백, EMDR(안구 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 연극치료 등 다양한 접근과 치료 성과들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대로 된 트라우마 치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트라우마 기억에 압도되지 않은 상태로 사고 당시의 기억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뇌가 깨어 있도록 유도해서 현재를 인식할 수 있을 때 안전하게 트라우마 기억을 불러와 기존 기억 체계와 통합하는 과정도 밟아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서적 뇌’를 잘 돌봐야 합니다. 또 일상생활에서도 과잉 흥분되거나 지나치게 경직되지 않도록 평온하게 호흡하고 신체가 이완된 상태를 유지하도록 훈련하고, 잘 먹고, 잘 자고, 주변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냄으로써 이성적 뇌와 정서적 뇌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회복해야 합니다.
즉, 트라우마 치료에 있어서 잘 준비된 상태로 과거의 사건을 마주하는 것만큼이나 ‘지금-여기’에서 온전히 살아가는 것 역시 놓쳐서는 안 됩니다. 트라우마 생존자들이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지금 이곳이, 충분히 안전하며 일상에서 작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때, 트라우마로 인해 조각난 기억의 파편들을 보수하고 재건해서 ‘잃어버린 나’를 다시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당산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슬기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