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길을 갈 때, 우리 뇌도 함께 헤매고 있을까?
정신의학신문 |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모르는 길을 찾아가며 헤맸던 경험, 모두 한 번쯤은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지도 어플리케이션이나 네비게이션으로 실시간 안내받을 수 있는 요즘은 조금 덜할지 모르겠지만 그 옛날 종이 지도 한 장 들고 생전 처음 가는 길을 찾아가야 했던 시대에는 그 불편함과 막연함이 얼마나 컸을가 싶습니다. 이 길인가 싶어서 가 보면 막다른 골목이고, 저 길인가 싶어서 가보면 엉뚱한 곳이 나올 때 참 당황스럽고 땀이 삐질삐질 나곤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초행길도 쉽게 찾고 한번 간 길은 잘 잊어버리지 않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길눈도 어둡고 방향감각이 없어 ‘길치’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모르는 길을 갈 때 혹은 이미 아는 길을 지나갈 때, 우리 뇌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낯선 길을 찾아갈 때 우리 뇌도 함께 헤매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 뇌는 모르는 길을 찾아갈 때 아는 길에 비해 실제보다 더 멀다고 지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뇌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길에 대한 지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주변의 외부 환경에 대한 심적 표상으로서, 인지도(cognitive map)라고 합니다. 인지도를 통해 우리는 이미 아는 장소에 대해서는 대충 어느 정도 거리나 위치에 있는지 쉽게 가늠하고 찾아갈 수 있으며,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장소에 대해서는 이런 인지도가 아직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대략적으로 예상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개인차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손다이크(Thorndyke, 1981)는 참가자들에게 모르는 장소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추정하도록 하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실험 참가자들은 실제 거리와 상관없이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에 도시가 있다고 한 경우 그렇지 않을 때에 비해 더 멀다고 판단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에 도시가 있을 때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거리가 더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기반해 가정한 결과였습니다.
한편 스티븐 허틀(Stephen Hirtle)과 동료들은 사람들이 의미적으로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장소를 더 가까이 있다고 여긴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법원이 실제로는 편의점과 더 가까이 있더라도 경찰서나 다른 공공기관에 더 가까이 있다고 인지하는 것입니다. 이는 물리적 거리보다 의미적, 범주적 분류가 거리 인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물리적 거리와 관계없이 아는 길, 즉 이정표가 없는 곳에서 이정표가 있는 곳으로 여행할 때는 반대의 경우보다 거리가 더 짧다고 추정하는 경향을 ‘이정표 효과(landmark effect)’라고 부릅니다.
아는 길은 인지도에 기반하여 거리를 쉽게 예측하고 가깝다고 느끼는데, 이는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라는 영역과 관련 있습니다. 해마는 측두엽 좌우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 장소세포(place cell)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영국과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인 존 오키프(John O'Keefe)는 런던대(UCL)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70년대에 특정 뇌 신경세포가 특정 장소를 기억할 때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 세포가 바로 장소세포로, 환경에 대한 내적 지도를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이 장소세포 덕분에 우리는 한 번 왔던 길을 기억하고 현재 위치를 인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후 노르웨이의 신경과학자이자 심리학자로서 부부 연구자인 에드바르 모세르(Edvard Moser)와 마이브리트 모세르(May-Britt Moser)는 격자세포(grid cell)를 추가로 발견했습니다. 격자세포는 특정 장소를 지나고 인지할 때 해마와 함께 격자 모양으로 활성화되는 뇌세포로서, 위도와 경도처럼 뇌 공간을 일정하게 구획화하여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합니다.
장소세포와 격자세포가 서로 자극을 주고받으며 우리 뇌 속에서는 인지도가 형성되고, 새로운 길을 찾을 때마다 새로운 장소 정보가 업데이트되고 인지도 역시 업데이트됩니다. 모르는 길을 갈 때는 아직 인지도가 없기에 더 막연하고 멀게 느껴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길을 찾고, 때로는 헤매기도 하면서 우리 뇌 속 지도는 더욱 확장됩니다. 만약 낯선 길을 가지 않고 헤매지도 않는다면 우리 뇌는 이미 알고 있는 지도 이상으로는 업데이트되지 않을 것입니다. 낯선 길을 찾으며 당황하고 불안할 때도 우리 뇌는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새로운 길을 찾고, 헤매기도 하는 것이 꼭 나쁜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학습과 지도의 확장을 위한 좋은 기회인 셈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끊임없이 선택하고 낯선 길, 미지의 영역에 도전해야 하는 인생길 위에서 우리는 막연함과 불안함을 느낍니다. 잘 알지 못하는 길이기에 더 멀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혹시 방향을 잃고 헤매면 어쩌나 싶기도 합니다. 이정표가 있는 길로만 안전하고 편안하게 다니고 싶은 유혹도 찾아옵니다. 하지만 익숙한 길만 선택한다면 이미 경험하고 아는 것 이상으로 인생의 지도를 넓혀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이 길 역시 한때는 낯선 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려움을 극복하고 한 걸음 내디딜 때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발견하게 되고, 다음번에는 더 자신감 있게 그 길을 다시 갈 수 있습니다. 어떤 길은 지름길일 수도, 또 다른 길은 조금 더 돌아가는 길이지만 풍경이 아름다운 길일 수도 있습니다. 더 많은 길을 걸어 볼 때 우리는 더 많은 길에 대한 정보와 그 길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각 길의 장단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장소세포와 격자세포에는 얼마나 다양한 길에 대한 정보가 저장되어 있나요? 낯선 길을 즐거운 마음으로 탐색하며 인생의 지도를 넓혀 가는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정엽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