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AI일지라도, 대화가 필요해
정신의학신문 | 장승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영화 <조커>에서 정말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던 호아킨 파닉스의 작품을 찾아보던 중에 <Her(그녀)>라는 제목의 영화가 눈에 띄었다. 분홍색 바탕에 호아킨의 묘하게 몽환적인 표정이 눈에 띄어 이 영화를 시청하게 되었다. 영화에서 호아킨이 연기한 테오도르는 다른 사람의 편지를 멋들어지게 대신 써 주는 대필 작가로 일하지만, 정작 본인은 아내와의 별거 중인 채로 외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게임을 해서 시간을 보내도 공허하고, 채팅 사이트에 접속해 봐도 실망만 이어 가게 된다. 그러던 중에 인공지능 운영체제인 '사만다'를 만나게 되고, 테오도르는 사만다와 가상의 공간에서 대화를 이어 가며 사랑의 감정까지 느끼게 된다.
영화 자체는 흥미로운 설정으로 발전하는 인공지능이 사람처럼 감정을 가지고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의문은 애플의 '시X'나 삼성의 '빅XX' 같은 인공지능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어 보았다는 후기를 보았을 때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테오도르가 특이한 사람이어서 인공지능과 연애를 했다기보다는, 사람은 대화가 필요하기에 인공지능하고라도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현재 코로나가 3년째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사람들은 대화의 기회가 부족해진 채 지내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보통 사람들은 여전히 가족들이나 주변 직장인들과 소통하며 지내고 있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어떤 이들은 방송 크리에이터들과 대화하거나, 온라인이나 SNS, 오픈 채팅방에서 대화의 욕구를 해결하기도 하며 나름의 적응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마치 영화 초반의 테오도르처럼 집 안에서만 갇혀 지내게 된다. 이런 분들은 어떤 마음 상태로 지내고 있을까?
실제 통계개발원이 발표한 '국민 삶의 질 2021' 보고서를 보면, 사회적 고립도는 34.1%로 통계 작성 이후에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27.7%)과 비교하여 6.4%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보건복지부 '2021년 코로나19 국민 정신건강 실태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 발생 초기와 비교했을 대 자살 생각 비율이 40% 정도 증가했으며, 5명 중 1명은 우울증 위험 상황에 놓인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전문의가 되어 직장인이 많은 지역에서 진료를 보다 보니, 지방에 사는 가족들과 떨어져 서울에서 홀로 자취를 하며 회사를 다니는 분들이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회사 안팎에서 의미 있는 인간관계를 잘 맺지 못하면,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대화 욕구를 해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나친 음주에 빠지기도 하고, 요새 유행하는 코인, 주식이나 도박, 심지어 유흥으로 이러한 욕구를 해소한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분들은 아예 해소하는 방법을 몰라 회사를 가지 않는 주말이 되면 자취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며 영상 콘텐츠만 소비하면서 지낸다. 물론, 이런 방식이 그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은 활동성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저조한 활동은 우울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이런 관점으로 영화를 보게 되면,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소통이 꼭 특이한 소통의 형태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대화형 AI는 존재하고 있으며, 수년 전에는 '심심이'라는 소프트웨어가 개발되어 여러 이슈를 불러일으킨 바가 있었다. 아직 깊은 대화가 불가함에도 불구하고 이슈가 되었다는 점은 오히려 사람들이 대화를 갈구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직까지 아주 성능(?)이 좋은 대화형 AI는 개발되지 않았기에 이런 AI 없이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없을까?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세부적으로는 다양하게 있을 수 있지만,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나의 '외로움'과 마주하는 것이다. 외롭기 때문에 누군가와 이어지려고 애를 쓰다 보면, 연락의 빈도, 대화의 내용 등 사소한 부분에 신경 쓰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착각과 억측이 생기기 쉬우며, 외로움은 더 깊어질 가능성이 높다.
역설적으로 나의 '외로움'을 인정하고 마주하면, 오히려 나의 고독을 보듬어 줄 수 있는 기회나 힘이 생기기도 한다. 나만의 '위안을 주는 장소'에서 나의 외로움을 가만히 다독여 줄 수 있기를 바란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장승용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