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Mail] 모든 것이 공허하고 무감각하게 느껴집니다
정신의학신문 |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열다섯 살 중학생이에요. 제가 도대체 어떤 상태인 건지 알고 싶어서 글을 작성해 봅니다.
저는 믿고 의지할 상대가 없습니다. 가족들은 표면적으로 봤을 땐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그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신뢰할 만한 가치가 없어 보이는 분들이며, 친구들 또한 겉으로 친구인 척할 뿐 실제로 친구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어서 짧게 요약하자면, 저는 중학교에 올라오면서부터 외국에 나왔고, 학업 스트레스와 인간관계의 대한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믿고 의지하던 사람들의 부재 및 배신이 원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신호들을 전부 무시했고 점점 우울해졌습니다. 놀이공원을 가도, 어렸을 적 친구들을 만나도, 기뻐할 만한 일이 생겨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속이 빈 듯한 느낌을 아주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미래의 행복을 좇으며 현재의 내 숨통을 조이는 제 자신에게 큰 실망감을 느끼고 가족들과 조그마한 트러블만 생겨도 자살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웃어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고, 다른 사람 앞 서있을 때면 마치 가면을 쓰고 리액션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 실제 제 모습과 괴리감이 들기도 합니다. 이 느낌들을 가지고 일 년 반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가끔은 이 의문 모를 감정들이 단지 사춘기 때문인 건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해결 방안을 찾을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현재 외국에서 생활하는 15세 학생이시네요. 타국에서 낯선 환경과 문화에 적응하는 스트레스도 상당히 있을 것 같은데요, 학업 스트레스와 더불어 대인관계에서 의지할 대상이 없고, 배신당한 경험도 있었네요. 많이 힘들고 버거운 일들이 있었는데, 이를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서 혼자서 고군분투하느라 더욱 힘들었을 듯합니다.
글에는 사연자님이 힘들었던 일들에 대한 신호를 전부 무시하고 결국 우울해졌다고 적어 주셨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래도 사연자님이 자신의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이해하는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 사연자님께 필요한 건 마음을 솔직하게 나눌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게 가족이면 좋을 텐데, 때로 가족이 신뢰할 대상이 전혀 되지 못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사연자님도 가족과 갈등이 생기면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떠오른다고 하셔서 참 안타까웠습니다.
사연자님 말에 따르면 가족이 겉으로 볼 때 정상이지만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신뢰할 가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가족의 속마음을 어떻게 깊이 들여다보고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이를테면 가족과 의사소통하는 과정이 어떠했고, 어떤 부분에 실망감을 느끼고, 의지하기를 포기하게 되신 건지, 그리고 사연자님이 가족에게 원하는 구체적인 태도는 무엇일까도 궁금했습니다. 사연글에는 생략된 내용이 많습니다. 굳이 생략하지 않아도 되고, 익명 게시판이라 좀 더 편안하게 모든 걸 털어놓아도 될 텐데, 표현을 다소 절제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실제 대인관계에서도 표현되지 않은 사연자님의 이야기가 무척 많을 것 같습니다.
사연자님이 느끼는 공허함이나 괴로움은 ‘감정 표현의 억압’에서 비롯될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 느끼는 것에 비해 표현되는 양이 현저히 적다는 겁니다. 느끼는 것을 혼자 잘 정리하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이를 제대로 표현하는 능력도 중요합니다.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친밀하고 신뢰로운 대인관계가 형성됩니다. 실제 모습과 다르게 가면을 쓰고 리액션하는 관계는 어쨌든 피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타인에게 진심을 드러내지 않는 패턴이 쌓이면, 스스로 진실한 감정도 느끼기 어렵게 되고, 결국 타인도, 자신도 소외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누군가와 마음을 나눌 때 무엇을 예상하기에 사연자님이 있는 그대로를 표현할 수 없는 걸까요? 배신당한 기억이 아직도 영향을 미쳐서 두려움에 가로막혀 그런 것이라면, 그 기억을 치유하는 작업을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셨으면 합니다. 심리 서적이나 일기를 통해 혼자 힘으로 정리하는 방법도 있지만, 혼자 하기 어려워 이곳에 글을 남기신 거겠지요. 정기적으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외부 대상이 필요합니다.
당장 의지할 가까운 지인, 가족을 찾지 않아도 됩니다. 오프라인, 온라인에서 상담할 수 있는 전문가를 찾으세요. 현재 외국에 사는 청소년이니 오프라인 상담이 어려운 환경일 수 있겠는데요. 여성가족부 사업으로 운영되는 청소년사이버상담센터를 들어가면 365일 24시간 언제든 무료로 온라인 채팅상담이나 문자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글을 쓰신 것처럼 솔직하고 꾸준하게 사연자님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채널을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현재 감정을 표현하는 채널을 통해 사연자님의 마음을 잘 알게 되면, 사소한 감정 변화도 다 느낄 수 있습니다. 굳이 억압하지 않고 실제 느낀 대로 자유롭게 표현하게 되면 좀 더 편안하게 대인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연자님의 마음가짐이 달라짐에 따라 대인관계도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변화’가 생깁니다. 꼭 변화가 좋은 것만 동반하진 않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결국 혼란스러운 자기 감정들을 이해할 좋은 기회가 됩니다.
사춘기는 단순히 감정이 복잡하게 널뛰는 과정이 아닙니다. 정신세계가 깊어지고 넓어지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깊고 넓어진 공간은 생각과 감정이 가득 채우게 됩니다. 잘 정리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뒤죽박죽 공간만 가득 채우니 심리적으로 무척 버겁게 됩니다.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단지 지금은 사연자님이 자신만의 방법으로 마음의 공간을 정리하는 중인 겁니다. 노하우가 생기기 전까지는 처음 접해 보는 상황이라 낯설고 서툴기 마련입니다. 원인 모를 감정들을 너무 배척하지 말고, 자신을 이해할 중요한 단서로 따뜻하게 바라보셨으면 합니다. 사연자님의 일상을 응원하겠습니다.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호선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