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이솝 우화 (8) - 술친구는 친구가 아니다 – 곰과 나그네
발칙한 이솝 우화 (8)
[정신의학신문 : 사당 숲 정신과, 최강록 전문의]
술친구는 친구가 아니다 – 곰과 나그네
두 친구가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좋은 구경도 많이 하고 맛있는 음식도 잔뜩 먹었습니다. 즐거운 여행을 통해 두 친구는 우정이 더욱 굳건해졌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큰 숲 속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다음 여행지로 가려면 그 숲을 지나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숲 속에는 커다란 곰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난폭하고 무시무시한 곰이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두 친구는 걱정이 됐지만, 주위를 살피며 조심조심 지나기로 했습니다.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죠. 한참을 걷는데,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 곰이 나타났습니다.
“으악, 곰이다!”
한 친구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하더니 재빨리 근처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달음질이 어찌나 빠르던지 순식간이었습니다. 게다가 원숭이처럼 나무도 잘 타서 곰이 도저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만큼 높이 올라가 안전하게 몸을 피했습니다.
다른 한 친구가 문제였습니다. 그는 달리기도 잘못하고 나무를 타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허둥지둥 몸을 피하려다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곰은 나무 위로 피신한 친구는 쳐다보지도 않고 쓰러진 친구를 향해서 걸어왔습니다. 아찔한 순간이었죠.
‘그래. 곰은 시체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한 것 같아. 죽은 척하면 무사할 수 있을 거야.’
땅에 쓰러진 친구는 어른들께 들었던 말씀을 떠올리며 죽은 척 숨소리도 내지 않고 엎드려 있었습니다. 무서운 곰이 가까이 다가와 코로 냄새를 맡고 이리저리 훑어보며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확인하는 것 같았습니다. 혹시라도 들키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기에 간이 콩알만 해졌습니다. 다행히 곰은 쓰러진 친구 곁을 한참 배회하다가 어슬렁거리며 자기 갈 길을 그냥 가버렸습니다. 엎드려 있던 친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앉았습니다.
쏜살같이 나무 위로 몸을 피했던 친구가 곰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내려와 친구에게 다가갔습니다. 혼자 부리나케 몸을 피한 게 미안했는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아, 그러니까 빨리 도망을 갔어야지. 큰일 날 뻔했네. 아무튼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한데 아까 보니까 곰이 자네 귀에 대고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던데, 뭐라고 말하던가?”
땅에 엎드려 있던 친구가 나무 위로 도망쳤던 친구를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친구를 버려두고 자기만 도망치는 사람과는 빨리 헤어지라고 하더군.”
사람을 뜻하는 한자 ‘인(人)’ 자는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있는 모습에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게 인생이라는 깊은 의미가 담긴 글자입니다. 한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인간은 관계를 통해 가치를 찾고 의미를 발견하는 존재입니다. 완전한 독립 인간, 고립 인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태어나면서 부모를 만나고, 자라면서 친구를 만나고, 공부하면서 스승을 만나고, 사회에 나와 동료를 만나고, 나이 들면서 연인을 만나고, 결혼해서 자녀를 만납니다. 나이에 따라 자신이 속한 그룹에 따라 만나는 사람이 달라집니다.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반면 그들과 나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은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 가면서 만나는 사람도 달라지고 인간관계도 변화합니다. 그렇지만 평생 변함없이 지속되는 관계도 있습니다. 친구 관계입니다. 부모도 세월 가면 자식 곁을 떠나고, 배우자도 자신의 어린 시절은 알 수 없으며, 자식 역시 나이 들면 부모 울타리를 벗어납니다. 사회에서 직장을 다니며 사업을 하며 비즈니스 관계로 만난 사람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이 상황이 변하면 소원해지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친구가 중요합니다. 나와 동시대를 살아온 추억을 공유하면서 부모나 배우자나 자식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부담 없는 관계가 친구 관계입니다. 그래서 좋은 친구는 정말 소중합니다.
‘곰과 나그네’ 우화는 우리에게 ‘진정한 친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과연 어떤 친구가 진정한 친구일까요? 여행을 떠나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놀이를 즐기고, 기쁨을 나누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일까요? 우화는 그런 친구가 진정한 친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잘될 때, 내가 여유가 있을 때, 내가 즐거울 때, 내가 뭔가 줄 수 있을 때 만나는 친구들은 진정한 친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내가 안 될 때, 내가 여유가 없을 때, 내가 괴로울 때, 내가 아무것도 줄 수 없을 때 아니 내가 뭔가 달라고 손을 내밀어야 할 때 나를 외면할 친구들입니다. 다는 아니라 해도 십중팔구 그렇습니다.
“술친구는 친구가 아니다.”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술 마실 때만 친구지 정작 필요할 때나 위급할 때는 남과 다르지 않은 친구는 사실 친구도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위 우화 속 친구 관계가 딱 그렇습니다. 함께 여행하고, 함께 밥 먹고, 함께 술 마시고, 함께 기쁨을 누릴 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 같지만, 곰이 나타났을 때는 친구고 뭐고 둘러볼 것도 없이 오로지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갑니다. 그런 친구가 바로 술친구입니다. 술이라는 즐거움을 매개로 연결된 친구죠. 술이 없어지면, 즉 즐거움이 사라지면 이내 냉랭한 관계가 됩니다. 내가 만나는 친구, 내 곁에 있는 친구, 내가 알고 있는 친구가 술친구인지 아닌지 냉정하게 판단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친구 사이의 정을 우정(友情, Friendship)이라고 합니다. 사랑의 감정 중 하나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랑의 감정을 네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첫 번째는 ‘에로스(Eros)’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 즉 충동적인 성적 쾌락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스토르게(Storge)’입니다. 부모가 자녀에 대해 느끼는 사랑 혹은 자녀가 부모에 대해 느끼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가족 간의 사랑이죠. 세 번째는 ‘필리아(Philia)’입니다. ‘친구’라는 뜻의 그리스어 ‘필로스’에서 유래한 말로 친구 간의 우정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친구 사이의 우정에만 한정된 게 아니라 다양한 인간관계에 존재하는 우애를 아우릅니다. 상대방을 자기 자신과 대등하게 여겨 아끼고 사랑하는 것으로 순간적 감정이 아닌 상당한 시간 동안 지속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얻게 되는 친밀감입니다. 네 번째는 ‘아가페(Agape)’입니다. 무조건적 사랑, 절대적 사랑을 뜻합니다.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 인간의 신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인간 상호 간의 형제애를 일컫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사랑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책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필리아, 즉 우정에 관하여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는 필리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순수성, 상호성, 인지성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필리아는 자신의 이익과 관계없이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이 있어야 하고, 이런 순수한 마음은 서로에 대해 쌍방향으로 존재해야 하며, 그런 상태를 피차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는 필리아의 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거나 뭔가 유익한 것을 얻음으로써 형성되는 필리아, 단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필리아, 상대방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서로 선의를 갖는 필리아가 그것입니다. 그는 세 번째 필리아가 최고 수준에 해당하는 필리아라고 했습니다. 행복을 위해 사람에게는 필리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 이것이 진정한 우정이고, 이런 마음을 두 사람이 같이 느끼고 유지하는 게 친구입니다. 나의 쾌락과 이익 때문에 상대방을 필요로 하는 건 필리아가 아닙니다. 사람은 대단히 복잡한 존재입니다. 많은 게 충족되어도 여전히 허전함을 느끼는 것이 사람입니다. 아무리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화려한 인맥을 쌓은 사람이라 해도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나눌 속 깊은 친구가 없다면 그의 인생은 한없이 쓸쓸합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어줄 수 있는 진정한 친구 한두 명만 있다면 그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다.”
어른들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보니 그렇다는 것이죠. 젊었을 때는 이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도 체감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은 친구, 진정한 친구를 만나거나 사귈 수 있을까요?
좋은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턱 하고 나타나길 바라는 건 요행입니다.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거죠. 내가 요행을 바라고, 미덥지 못하고, 유익만 바라고, 필요에 따라 사람을 만나는데 어떻게 진정한 친구가 생길 수 있겠습니까? 좋은 친구를 둔 사람은 그 사람도 좋은 친구인 겁니다. 진정한 친구가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바로 진정한 친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친구에게 바라는 것과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내가 먼저 친구에게 실천해야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화 속 두 친구는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위급한 상황에서 친구의 속내를 비로소 알게 된 다른 친구는 여행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술친구는 친구가 아니다.” 이 말을 곱씹으면서 말이죠. 어쩌면 그동안 술친구를 진정한 친구로 착각하며 살아온 자신을 탓하며 슬픔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릅니다.
시인이자 수필가였던 피천득 선생은 『인연』이라는 책에 이런 글을 남겨 두었습니다.
“나무는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르는 것이 더욱 어렵고 보람 있다. 친구는 그때그때의 친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좋은 친구는 일생을 두고 사귀는 친구다. 우정의 비극은 이별이 아니다. 죽음도 아니다. 우정의 비극은 불신이다. 서로 믿지 못하는 데서 비극은 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