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불호 - 타인과 나 사이에서
[정신의학신문 : 당산 숲 정신과, 이슬기 전문의]
피자 VS 치킨, 짜장면 VS 짬뽕, 밀 떡볶이 VS 쌀 떡볶이
맛있는 음식 찾아 먹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면 위 대결 구도에서 무엇을 먹을지 메뉴를 고민해본 적 있을 것이다. 혹 어떤 사람은 취향이 이미 명확하게 정해져 있어 손쉽게 메뉴를 골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10초 이상 망설인 사람이라면 이 글을 유의 깊게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어떠한 이유로 망설였는지 지금부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더더욱.
대학 친구 중 한 명은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생길 때마다 옷 스타일이 바뀌었다. 친해지는 친구의 스타일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 친구는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나는 줏대가 없는 것 같아. 나만의 취향이 없는 걸까?”
친구는 자신만의 선택을 하고 싶다가도 확신을 갖지 못했다. 특히, 타인의 말에 너무 잘 흔들리며 눈치를 보는 것 같다며 울적해하기도 했다. ‘선택’의 문제에 관한 한 부정적인 평가뿐이었다. 혼자 있을 때보다 타인과 함께 있으면 정도가 심해진다는 면에서 그랬다.
또 다른 친구는 단체로 간 중국음식점에서 본인은 짬뽕을 먹고 싶은데, 다들 짜장면을 고르니 원래 먹고 싶던 짬뽕을 뒤로하고 짜장면을 주문했다. 혼자만 튀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소외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누구나 한 번쯤 타인의 눈치를 보고 선택을 보류한 적이 있을 것이다. 다들 파스타를 선택했는데, 혼자만 피자를 고르기 꺼려지는 것과 같이 말이다.
왜 친구들의 메뉴를 고려하여 나의 메뉴를 선택하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친구들을 만나는 목적은 소속감을 가지는 것에 있고, 소속감은 자아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한 집단에 속하는 것은 가족과 같이 생득적으로 주어질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 친밀감과 유대감을 쌓으며 형성되기도 하고 상호작용에 의해 변화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미국 볼 주립대학(Ball State University) 교수 Davidhizar의 말을 빌려보자. Davidhizar는 타인과의 접촉에 변화 혹은 상실을 경험하였을 때, 친밀감 유지에 방해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에, 외로움이 온다고 하였다.
혼자만 피자를 고르지 못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스파게티로 대동단결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선택에 소외감을 느낀 이유와 같다. 스파게티와 피자로 타인과의 접촉을 구분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타인과의 관계는 개인의 결정과 선택에 큰 영향으로 작용한다. 사회적 관계에서 타인이 자신에게 보이는 정서적 반응의 기대 수준과 실제 수준이 불일치할 때 외로움이 발생한다. 친해진 사람의 옷 스타일을 따라가며 자신만의 줏대가 없다고 고민하던 친구,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뒤로하고 짜장면으로 메뉴를 통일한 친구를 생각해보자. 이들은 옷 입는 취향이 비슷하다는 것을 실제로 확인할 때나 같은 음식을 선택했다는 결과를 통해서 친밀감과 유대감의 실체를 느낀다. 매번 같은 음식을 선택해야 정말 친한 친구라 생각하는 것은 이상적인 기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옷 입는 취향이 다르면 유대감이 약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실제로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필수조건인 경계에 대한 혼란일 수 있다. 이상적이고 높은 일치감이 있어야만 친밀감이나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면 ‘I-position’이란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기 생각이 뚜렷하고 척척 망설임 없이 선택하는 사람들을 동경한다. 자신감이 있어 보이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이에 대해 ‘I-position(자기 입장 견지하기)’을 잘 유지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I-position’은 명확한 자아감을 갖는 것이다. 타인의 압력이 있을 때도 자신의 고유한 생각과 느낌, 신념 등을 명확하게 표현하며, 이에 입각해서 행동하는 정도라 할 수 있다.
‘I-position’이 잘 유지되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음식 메뉴를 정확하게 아는 사소한 것에서 나아가, 자신의 주장과 생각을 표현할 줄 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의 동경을 받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자기 입장을 뚜렷하게 견지하는 일은 어렵다.
네덜란드 VU University Medical Center의 연구에 따르면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 간에 갈등이 많은 사람일수록 ‘I-position’을 유지하기가 어렵고 이는 낮은 자존감으로 이어진다고 하였다. 우리는 누군가의 아들/딸이기도 하고 회사에서는 사원이나 과장이기도 하다. 때로는 편의점의 소비자이기도 하고 책을 읽는 독자이기도 한 것이다. 많은 역할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면서 그에 알맞은 행동을 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여러 역할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느낌과 가치관을 유지할수록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한유미 씨는 직장에서 일회용품을 줄이기 위해 텀블러를 가지고 다닌다. 주말에는 아픈 엄마를 간병한다. 간병 중 나오는 쓰레기는 라벨을 떼 철저히 분리수거한다. 두 아이와 소풍 갈 때도 쓰레기봉투를 필수로 챙긴다. 한유미 씨는 직장인이자 누군가의 딸, 간병인, 두 아이의 엄마 역할을 두루두루 수행한다. 그러면서도 환경보호를 위하는 자신의 가치관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다. 매 순간 자신의 가치나 경계를 철저히 지키며 살아가기는 어렵다. 환경보호론자라고 하더라도 가끔은 무거운 가방이 버거워 일회용 컵을 사용하기도 하고, 팀원들과 어울리기 위해 탈이 날게 뻔한 매운 떡볶이를 먹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고유한 느낌과 가치관이 무엇인지 알고 훼손되지 않는 범위에서 친밀감과 연대감을 쌓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입장’이란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갖는 힘이다. 자아감을 위해 지켜야 하는 것과 타인과의 연대를 위해 바꿀 수 있는 것을 정확히 알고, 또 알려줄 수 있을 때, 오히려 타인과의 갈등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
호불호가 없거나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발달하는 동안,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구를 지속적으로 가진다. 친밀감을 느끼고 싶은 ‘I-Position’과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고 싶은 ‘I-Position’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인정하고 구분할 수 있을 때, 스스로를 잘 세우는 동시에 친밀감에 손상을 입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마주하지만, 그 선택이 옳은 결과를 가져다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기 자신조차 바뀔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호불호가 명확하다는 것,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단호함은 얼핏 딱딱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야말로 자연스러움, 유동적인 선택과 같은 말인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을 위한다는 면에서 언제든 바뀔 수 있으니 말이다.
오늘은 무슨 음식을 먹을까?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천천히 고민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