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 오브 카드

정신과 의사와 함께 보는 넷플릭스

2022-01-04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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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악인에게 매혹되는가.

우리는 노파의 머리통을 도끼로 찍어버리는 '죄와 벌'의 주인공에게 이입하기도 하고, 전기톱으로 동료를 썰어버리는 '아메리칸 싸이코'의 주인공에게 이입하여 빠져들기도 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악역의 눈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는 이야기에 매료되어 왔다.

악역에 열광하고, 악역이 주인공인 스토리에서 더 강한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 정도의 악인이 아니다.

우리는 왜 악인에게 이입하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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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오브 카드'는 백악관의 정치 싸움을 그려낸 넷플릭스의 대표 드라마이다. 드라마 속 백악관은 사바나처럼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하고 지저분하다. 그 곳은 기만과 위선으로 분장한 암투가 삶과 죽음을 가른다. 실제로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은 이 드라마를 보며 실제 백악관의 정치와 다를 바 없다며 흥미로워하기도 했다.

그리고 주인공 프랭크 언더우드는 그 초원의 포식자다. 일말의 죄책감 없이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내팽개치면서 겉으로는 위선에 가득 찬 미소를 짓는다. 필요하다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악역이다.

그러나 수많은 다른 명작들이 그러하듯 우리는 이 드라마를 보며 그 악인에게 빠져든다. 심지어 때로는 프랭크를 동정하고 프랭크의 아픔에 공감하기도 한다. 프랭크의 승리를 기원하며 그와 함께 마른 침을 삼키면서 선거 결과를 지켜보게 된다.

사진_넷플릭스 '하우스 오브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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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우리가 악인에게 이입하는 이유가 우리 모두 악당처럼 행동하고 싶은 파괴적 본능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억압되어 있던 무의식의 악한 면이 작품 속의 캐릭터로 승화되었다고 분석한다.

일리가 있다. 인간이 문명사회를 만들게 된 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아직 사바나의 본성, 생존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목덜미를 물어 뜯어버릴 공격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되었기 때문에 자라나며 그것을 억눌러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 동물적인 에너지를 다른 여러 허용적인 형태로 변형시키는 법을 익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작품에 몰입하는 것도 그러한 작업의 일환이 될 수 있다. 간접경험을 통해 내면의 실질적인 에너지가 상상 속 가상의 에너지로 해소되는 작업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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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가 모든 악인에게 이입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악역 캐릭터를 통해 우리의 공격성을 해소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때려 부수고 잡아 죽이는 모든 캐릭터에게 이입하지는 않는다.

소설가 김영하는 산문집 ‘읽다’를 통해, 우리가 악역에 매료되는 이유가 그 ‘스토리’에 매료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윤리적 기준과 선악 구조를 떠나, 그 인물의 서사에 매료되는 순간 우리는 그에게 이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일단 그에게 빠져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이야기가 재미있고 설득력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어 세계를 체험하는 아주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그 때부터 문학작품을 통한 간접경험의 마법이 시작되는 것이다. 서사가 매혹적이라면 우리는 사기꾼이나 살인범에게도 얼마든지 이입할 수 있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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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오브 카드의 악인 프랭크는 카메라를 직시하고, 관객과 직접 눈을 마주치며 관객에게 말을 걸어오며 제 4의 벽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 덕에 정치판의 고루한 서사는 리드미컬하고 매혹적인 이야기로 탈바꿈하며 관객의 시선을 흡입한다.

드라마의 첫 회는 이제 막 대통령이 바뀐 백악관의 정신 없는 이전투구를 보여주는데, 그 아연할 복잡함 앞에서 관객들이 피로감을 느끼려는 찰나 프랭크가 절묘하게 말을 걸어온다. 그는 백악관의 얽히고 설킨 정치 상황을 친근하게 설명해주며 관객을 순식간에 그 복잡한 게임판으로 납치한다. 프랭크 덕에 관객들은 마치 스스로가 그 흥미진진한 게임판의 플레이어로 참가하고 있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마법처럼 어느 순간 그 서사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자연스럽게 프랭크에게 이입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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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친절하고 자세한 해설은 결국 온전히 프랭크의 시선일 뿐이다. 관객의 시선이 따라가는 곳은 결국 프랭크가 바라보는 백악관의 모습이며, 관객이 체험하는 바 역시 프랭크가 체험하는 하우스 오브 카드의 세계이다.

그렇게 관객들은 어느새 프랭크의 경험을 내면화한다. 프랭크라는 냉혈한의 삶에 이입하면서 간접적으로 그곳을 경험하게 된다.

사진_넷플릭스 '하우스 오브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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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프랭크처럼 뻔뻔하고 냉혈하지 않다. 그러나 하우스 오브 카드를 보면서 프랭크 언더우드를 시종일관 증오하고, 경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프랭크와 함께 극을 따라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매력에 이미 빠져버린 관객은 어느새, 프랭크가 하고 있는 행위가 악행이건 아니건 프랭크를 응원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프랭크가 피터 루소를 쳐다 볼 때에는 관객 또한 가젤을 바라보는 사자의 시선으로 피터 루소를 바라보게 된다. 관객은 적어도 이야기의 세계에서 만큼은 사기꾼, 위선자, 독재자, 냉혈한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 프랭크의 삶이 조금씩 섞여 들어가는 경험이다. 적어도 드라마를 보는 순간만큼은, 프랭크가 될 수 있다.

악인의 이야기에 매혹되었다면, 우리는 악인의 삶을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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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타인의 시선에 이입하는 과정은 드라마나 소설 같은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이는 모든 인간관계의 본질적인 원리이다. 왜냐하면 모든 의미 있는 관계에서도 필연적으로 이야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게 되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된다. 단편적인 몇 가지 정보들만 가지고도 순식간에 일련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사람의 목소리와 말투를 보며 어떤 성격의 사람이고 친구 관계는 어떠할지 상상한다. 옷차림새와 분위기를 보며 어떤 배경에서 살아왔는지, 또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을지를 상상한다. 이러한 상상들이 중첩되며 그 사람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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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를 정신분석에서는 판타지(Fantasy)라고 부르는데, 이는 매우 무의식적이어서 그 구조 자체가 비논리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이런 판타지가 없으면 우리는 상대방과 의미 있는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상대방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상대방은 어떻게 생각할까, 같은 시뮬레이션을 위해서는 상대방을 어떤 일련의 이야기 속 일관된 인물로 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그 사람에게 좀 더 깊이 이입할 수 있고, 그 사람의 시점에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의사소통이란 이렇게 나의 이야기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끊임없이 시점이 오가길 반복하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간에 관계가 엮어진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겹쳐지고 덧씌워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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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실 속 우리의 실제 삶은 그렇게 일관된 이야기로 짜여 있지 않다. 삶은 기승전결을 거쳐 선형적인 이야기를 따라가는 소설이나 영화가 아니다. 그보다는 무수한 사건들이 그저 임의로 충돌할 뿐인 브라운 운동에 좀 더 가깝다. 현실 자체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사자가 가젤을 잡아먹는 장면에는 어떠한 이야기도 들어있지 않다. 그저 즉자(卽自)하는 사바나의 한토막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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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우리가 만들어낸 일련의 이야기, 즉 판타지는 본질적으로 언젠가 분열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어느 순간 혐오스러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곤 한다. 반대로 너무나 혐오하는 누군가에게서 애틋한 면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다른 사람뿐만이 아니다. 나 자신에게 투영하는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 순간들을 매일 마주하며 살아간다. 스스로에게서 납득할 수 없는 모습을 발견하고 공황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차이점을 발견하는 순간이 바로 판타지가 분열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해할 수 있는 일관된 이야기의 세계가 어느 순간 갑자기 뜯겨져 나가는 순간이다.

사진_넷플릭스 '하우스 오브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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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는 달려오는 지하철에 조이 반즈를 밀어버린다. 자신과 함께 전략을 짜고 관계까지 맺었던 그녀를 폐품 버리듯 살해한다. 그리고 거울을 통해 느닷없이 관객과 눈을 마주치며 말을 건다.

 

“내가 당신을 잊은 줄 알았나요?”

그제야 관객들은 깨닫는다. 프랭크가 사람을 죽이기 시작한 뒤로 관객에게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다는 것을. 그가 오랜만에 화면 너머로 말을 건네는 순간 관객들은 살인자에 대한 소름 끼치는 혐오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두려움에 아연실색해 있는 관객에게 프랭크는 한번 더 말을 걸어오며 정곡을 찌른다.

 

“그러길 바랬을지도 모르겠네요.”

악당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 나쁜 놈이지만 나랑은 그래도 꽤 친하다고 느꼈던 애증의 캐릭터 프랭크 언더우드가 살인까지 하게 되면서, 관객은 그를 조금씩 낯설고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프랭크가 이제 그만 자신을 잊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불편한 감각을 송곳처럼 정확하게 찔러오는 프랭크의 거울 속 시선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름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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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반즈를 죽인 후 관객에게 말을 거는 프랭크의 모습이 거울 속 이미지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관객은 프랭크에게 이입하며, 화면 속 세계를 프랭크의 시선으로 경험한다. 때문에 프랭크가 혼자 남아 거울을 들여다보는 장면에서도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프랭크에 이입하고 있는 상태였다. 프랭크가 거울을 볼 때, 관객들 역시 프랭크가 되어 혼자 남아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프랭크의 시선이 관객을 향한다. 프랭크와 관객이 공유하던 시선은 그 순간 분열한다. 그것은 마치 거울 속의 내가 어느 순간 제 멋대로 움직이는 걸 목격하는 것과 같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나라고 여겨졌던 무언가가 나에게서 뜯어져 나가는 분열의 순간이다. 나라고 여기고 싶지 않았던 무언가가 좀 전까지 나의 일부였다는 것을 뒤늦게 확인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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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이야기가 깨어지고 이야기의 주체가 분열되는 순간에도 인간의 본능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깨어진 이야기를 수정하고 다시 기워간다. 분열을 마친 이야기는 통합된 새로운 이야기로 엮어진다.

프랭크와 나의 이야기 역시, 소름 끼치는 분열의 변곡점을 거치며 좀 더 복잡하고 입체적인 이야기가 되어간다. 드라마가 시즌을 거듭하면서, 관객은 그의 끔찍한 면을 혐오하면서도, 동시에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와 함께 할 수 있게 된다. 악인이 주인공인 작품을 본다는 것, 그것은 이런 모순된 시선을 함께 소화해내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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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오브 카드, 우리는 무얼 위해 우리는 이 비열한 정치인의 악다구니에 몰입하며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일까.

사실 무슨 대단한 교훈과 메시지를 기대하면서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는 것이 애초에 아니다. 그냥 재미있으니까 보는 것뿐이다. 프랭크에게 이입해서 드라마를 다 봤다고 해서 우리가 프랭크 같은 악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권모술수의 달인이 되지도 않는다. 깨달음을 얻고 정의의 사도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하우스 오브 카드라는 드라마를 본 사람, 새로운 인물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살아내는 경험을 한 사람으로 변할 뿐이다. 그렇지만 그 변모의 과정은 생각보다 꽤나 역동적이다. 하우스 오브 카드는 끊임없이 그 과정에서 도전을 요구한다. 비뚤어진 악역 프랭크를 우리들에게 직접 들이밀며 우리 내면의 무언가와 접붙히고 또다시 분열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정을 관객으로서, 또 동시에 드라마 속 등장인물로서 견뎌낸다. 그렇게 점점 하우스 오브 카드의 백악관을 매회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어쩌면 그 역동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 자아의 일부를 객체화하는 방법, 내면의 모순을 통합하는 방법, 분열을 통해 성장하는 방법.

 

이야기가 분열되는 순간은, 이야기가 끝나는 지점이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가 새로운 가지를 뻗어나가는 과정이다. 분열되었다고 생각한 나무는 완전히 쪼개지지만 않는다면 더 큰 가지를 품은 거목이 될 수도 있다. 드라마가 이어지는 한, 서사가 이어지는 한, 우리의 이야기는 성장하고 성숙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