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mail] 따돌림으로 생긴 수동공격성을 극복하고 싶어요

2021-12-06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 서대문 봄 정신과, 이호선 전문의] 

 

 

 

사연)

분명 어린 시절엔 이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사회생활을 하고, 학교에 나가고 세상 풍파를 겪으면서 분명 이렇게 변화된 것이 크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습니다.

사실 이 근원에는 청소년기에 유독 자질이 좋지 않은 선생님들과 정면으로 교무실에서, 교실에서 싸운 일이 많았고 그로 인한 따돌림을 심하게 받아서였습니다. 수업 시간의 발언의 부적절함과 체벌의 부당함 등에 저는 대놓고 맞서 싸웠었고, 그로 인해 불이익을 받을까봐 두려워하거나 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급우들에 의해 굉장히 심각한 따돌림을 (특히 고등학교 때) 받았습니다.

이 트라우마가 굉장히 커서 대학 진학 이후에도 상담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얘기했던 화두였는데, 지금에야 다 괜찮다고 생각한 순간 저의 인간관계에서 지나치게 타인의 악의를 상정한다든지, 나를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없을 거라든지, 나에 대해서 욕설을 할 거라는 피해망상 혹은 이런 고충을 털어놓으면 나를 하자 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을까 라든지와 같은 수동공격성이 상당히 크다는 점을 얼마 전에 친구로부터 지적받았습니다.

지적받은 당시에도 저는 굉장히 화가 났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는데, 아마 그로 인해 친구가 나를 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가장 무섭습니다. 그 이후로 친구와 나눈 대화의 갯수를 세고 나에게 얼마나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는지를 헤아리면서 끊임없이 이런 식으로 떠보는 것이 너무 괴롭습니다. 저에게도 편안하고 상대 친구에게도 편안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어떻게 구축하는 것이 좋을까요?

학업에도 지장이 있는데, 이런 피해망상과 수동공격성이 학생-교수 간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쳐 제대로 질문을 하지 않는다던가, 공부를 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방식으로 진화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점이 너무 괴롭습니다.

사진_freepik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사연 잘 읽어보았습니다.

사연자님께는 청소년기에 여러 가지 큰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부당한 일에 선생님과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셨는데, 또래들의 따돌림으로 돌아왔군요. 사연자님에게 커다란 상처가 된 것 같습니다. 대학교 때 상담을 받으면서 계속해서 화두로 삼아오셨던 걸 보면요. 이후에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지만, 친구분이 사연자님에 대한 피드백을 했고, 그 내용 때문에 분노, 두려움, 괴로움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셨습니다.

또한 사연자님이 ‘수동공격성’이나 ‘피해망상’이라는 용어를 쓰시면서 본인을 ‘문제시’하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약점, 강점, 한계 모두 포함하여 자신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은 분명 중요합니다. 그래도 심리학적인 용어를 붙이기 전에,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먼저 충분한 이해와 공감을 해보셨으면 합니다.

 

친구분이 사연자님에게 ‘수동공격성’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한 건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사연자님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동공격성이 정확한 의미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수동공격성(Passive-Aggression’)은 어떤 사람에게 불만이 있을 때, 이를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소극적인 방식으로 적대감과 공격성을 표출하는 것을 말합니다. 소극적인 방식을 예를 들면, 고의로 잊어버리거나, 시킨 일을 하지 않고 지연하는 것, 침묵하기, 애매한 화법으로 조롱하기 등 다양하고 미묘한 행동들로 분노를 드러냅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알지만 해주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행동이 대표적인 수동공격의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소극적인 방식으로 공격성을 드러낼까요? 비교적 안전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즉, 공격적 행동으로 지나친 갈등 상황이 발생하는 것보다는, 겉으로 볼 때 좀 더 평화로운 상황이 유지된다는 면에서 안전합니다.

사실 대인관계에서 ‘갈등’은 부딪히면서 서로를 깊게 알 수 있는 소통의 기회입니다. 하지만, 부딪히고 조율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따라옵니다. 적당히 견딜만한 스트레스인 경우도 있지만, 어떤 분들에게는 갈등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극도의 불안으로 경험되기도 하고요. 특히 수동공격적으로 표현하는 분들은 갈등을 ‘위협적’인 것으로 지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직접적인 표현보다 덜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연자님의 경우, 과거에 트라우마가 된 따돌림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연자님의 행동에 대해 심각한 따돌림이라는 타인들의 과도한 반응이 돌아왔으니, 그 이후에 타인을 바라볼 때, 불안한 마음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요. 사연자님의 말과 행동도 검열하고, 타인의 말과 행동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보다, 부정적인 뉘앙스는 없는지 ‘경계’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그만큼 따돌림을 당한 사건이 사연자님 삶을 뒤흔들 만큼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타인의 마음을 미리 짐작하는 습관은 당시에 사연자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방법은 불안한 대인관계 상황을 마음속에서 ‘통제’하는 느낌을 줍니다. 불안함을 다루려는 나름의 전략입니다만, 진짜 현실 속의 타인과 편안하게 관계를 맺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됩니다. 사연자님도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보다는, 받아들여질 만한 안전한 내용만 표현하거나, 솔직한 진짜 감정들을 많이 생략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학업에서 제대로 교수에게 질문을 하지 않는 것과 공부 안 하는 행동이 수동공격성 때문인지는 확신하긴 어렵습니다. 사연자님이 교수님에 대해 갖는 생각과 감정이 사연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수님이라는 대상에게 분노감이나 기타 표현하지 못한 부정적인 감정이 있는 상황이라면, 질문과 공부를 안 하는 행동은 수동공격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연 행동’ 자체는 다른 데에서 기인하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현재 대인관계에서 오는 많은 염려와 불안, 피해 의식적 사고로 인해 고통감이 심한 상황인데요. 차분하게 과제에 집중할만한 심리적 에너지가 많이 부족한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집중력이 유지가 이전처럼 잘 되고 있는지, 책을 읽어도 몇 페이지 이상 진도가 안 나가거나, 공부 효율이 지나치게 떨어지진 않았는지 돌아보셨으면 합니다. 불안감이 심해진 것이 원인일 수도 있으니까요.

사진_freepik

 

정리해보겠습니다. 먼저 사연자님이 수동공격적인 특성을 가졌다고 확신할 만한 근거는 아직은 부족합니다. 친구의 지적으로 인해 현재 관계 단절이 될까 봐 불안감이 큰 상태이며, 대인관계에서 솔직한 자기 표현이 어려운 상태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현재 사연자님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솔루션은 친구와의 대화입니다.

먼저 지적을 해준 친구와의 대화를 자세히 정리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친구가 단지 ‘당신은 이것이 문제다.’라는 말만 한 게 대화의 전부인가요? 사연자님은 친구분에게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래서 친구분이 왜 지적을 했고, 사연자님께 결국 무엇을 원한다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모든 대화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친구분이 사연자님과 가까운 사이라면, 분명히 사연자님과 관계를 계속 유지할 것을 전제하고, 성격을 지적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만일 지적만 한다면 상대방은 비난받는 느낌을 받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공격처럼 느껴지지 않게, ‘나’를 주어로 하여, 자신이 상대방의 행동으로 인해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는지를 ‘영향력’에 대해서 말하고, 원하는 바를 요구하는 화법이 대인관계에 좋습니다. 일명 아이-메시지(I-Massage)화법이라고 하지요. 친구가 단지 사연자님을 지적만 하셨다면, 이에 대해 분노, 억울함, 서운함 등 기타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만 합니다.

 

뒤늦게라도 친구에게 이를 모두 표현하셔야 수동공격적인 행동의 습관을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친구와 다시 대화를 하면서, 당시 친구에게 지적이 담긴 피드백을 들으며 ‘어떤 생각과 감정’이 들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세요. 예를 들면, “나의 부정적인 면을 비난하는 너의 말을 듣고(객관적 사실), 나한테 질리거나 나를 싫어하게 되어 관계를 끊어내면 어떻게 하지(주관적 해석)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과 함께 두려운 감정이 들었다. (감정 경험)” 이어서 사연자님이 친구에게 바라는 것을 이야기하세요. “이렇게 두려운 감정이 드는 것을 보니, 이 관계가 계속 잘 유지되길 바라는 마음이 나에게는 있다. 우리 사이가 더 나아지고 편안해지려면,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지 너도 표현해주면 좋겠다. 나같은 경우에는 너가 나에게 이러이러하게 행동해주길 바란다.”

직접 말을 하기 어렵다면 글로 전해도 좋고요. 이전보다는 더 솔직하게 표현해도 안전한 관계라고 믿어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지금 깨달았다고 괴로워하시지만,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예전이라면 같은 지적을 들어도 와닿거나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깨닫게 되는 ‘통찰’의 순간은, 충분한 경험들이 쌓인 상황에서 어느 순간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지금에서야 깨달았다면, 결코 늦은 게 아니라 경험들이 모여 드디어 지금 깨닫게 된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편안한 대인관계를 위하여 학교 상담센터에서도 더 표현하는 연습을 해보시길 권합니다. 사연자님은 과거와 현재의 경험으로 두려움을 많이 느끼고 이를 서툴러도 나름의 방식대로 표현해왔던 사람일 뿐입니다. 이를 무작정 ‘병리적’인 틀로 해석하며 스스로를 탓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앞으로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 수 있도록 주변에 도움을 꼭 청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