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속 마음을 읽다 (5) - 번아웃, 당신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인간의 숲에서 살아남기 (14)

2021-12-03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회사에서 팀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일은 원래도 많았는데 팀장이 되고부터는 챙겨야 할 게 더 많아졌어요. 성격상 누굴 시키느니 제가 하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해서 점점 일이 더 많아지는 것 같은데요. 일할 때는 괜찮은데 이상하게 요즘 울컥 화가 날 때가 많습니다. 운전할 때 특히 그래요. 나중에 생각해보면 별로 화날 일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왜 이러는 걸까요.”

 

번아웃 증후군, FOMO 증후군처럼 의학 증상이나 정신질환으로 분류되는 용어는 아닙니다. 이 증후군은 주로 직업환경에서 쓰이는 장기 피로와 열정 상실을 의미하는 심리학 용어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지나치게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을 느끼면서 무기력해지는 증상을 말합니다.

세계 보건기구는 제11차 ‘국제 질병표준분류기준’에서 번아웃 증후군을 정식 진단명은 아니지만 ‘건강상태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자’로 판단했습니다.

 

번아웃 증후군의 증상을 나열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기력이 없고 쇠약해진 느낌이 든다

쉽게 짜증이 나고, 노여움이 솟는다

만성적인 감기, 요통, 두통과 같은 증상에 시달린다

감정의 소진에 심해 우울하다는 감정을 느낀다

업무량이 지나치게 많아진 것 같고 예전과 달리 열정이 사라졌다

잠을 자도 피로가 누적되는 것 같고 이전보다 더 빨리 더 쉽게 지치는 것 같다

속이 텅 빈 것 같고 일과 자기 자신, 인생에 대한 회의감이 든다

사진_freepik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생각보다 “어? 나도 해당되는 증상이 많은데?”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그도 그럴 것이 취업포탈 ‘잡코리아’에서 직장인 49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국의 직장인 95.1%가 직장생활 중 한 번은 번아웃 증후군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당신이 위의 증상에 한 개 이상 해당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번아웃 증후군을 처음으로 정의한 ‘크리스티나 매슬라크’는 번아웃을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한 기준을 마련했는데요, 각 섹션은 탈진, 냉소, 능률입니다.

탈진 – 극도의 피곤함을 느끼는 정도

냉소 – 실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거나 냉소로 이어지는 정도

능률 – 업무에 집중을 못하거나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정도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심리상담가, 정신건강의학 관련 업무를 하고 있는 간호사 등 정신보건 직역이나 사람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서비스 직종, 영업직에서 번아웃 증후군은 흔히 일어납니다.

또한 회사에서는 중간관리자분들이 번아웃을 많이 호소합니다. 이들 중간관리자분들은 권한은 생각보다 적은데 권한 이상을 결정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분들이죠. 본인이 일일이 다 챙기자니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또 주변 직원들이 잘 따라주지 않거나 의욕은 있는데 업무에 익숙해지지 않아서 사연자분처럼 차라리 그냥 내가 하는 게 낫겠다 싶은데도 기다려줘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지속적인 불확실성이 무력감을 만들어내고, 결국 번아웃 증후군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번아웃에도 단계가 있습니다.(Edelwich와 Brodsky)

1단계 : 열성기

초기 입사 단계의 시기입니다. 열정이 넘치며 강한 자신감이 넘칩니다. 자신의 삶보다 업무에 대한 욕구가 뛰어나 보람과 성취감을 느끼는 단계.

2단계 : 침체기

열성기가 끝나가며 이제 슬슬 힘에 부치기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업무수행 자체는 큰 무리 없이 해내지만 입사할 적 느꼈던 흥미와 재미는 점점 떨어집니다. 슬슬 업무에서 오는 보람은 뒷전이 돼버렸고, 자신을 둘러싼 근무환경을 챙기기 시작하죠.

3단계 : 좌절

자신의 업무능력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자신이 이 회사에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회의감을 갖습니다. 직면한 업무를 피하고 싶다는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4단계 : 무관심

스트레스가 극에 다다랐을 때 느낍니다. 흥미가 없는 일을 지속해서 행할 때 더욱 실패감과 패배감을 겪습니다. 최후의 방법으로 ‘기권’을 선택합니다. 직무에 대한 모든 감정성을 차단한 채 그저 하루하루 버텨내기만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심한 스트레스는 견디기 힘듭니다.

사진_freepik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서 뇌 용적, 특히 전두엽의 크기가 큽니다. 전두엽 기능의 주요 역할은 쉽게 말하면 참는 것, 억제하는 것입니다. 강아지는 먹이를 앞에 두고 ‘기다려’ 정도만 잘해도 칭찬을 받지만, 인간은 전두엽 덕분에 일요일 저녁 ‘차라리 내일 세상이 멸망해버렸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아침에 씻고 면도하고 전철 타고 경기도에서 강남까지 출근을 그것도 매일 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전두엽의 기능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근육을 과하게 사용해서 힘이 빠지게 되면, 아무리 근육을 쓰고 싶어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전두엽의 힘도 회복되지 않고 계속 쓰면 고갈되어버립니다.

 

전두엽 기능이 고갈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인증’이라는 증상을 호소합니다. 자신의 정신이 몸에서 분리된 것처럼 느껴지거나, 스스로가 관찰자가 되는 듯한 증상을 느끼는 증상이지요. 세상이 막연해지고 현실감을 상실하게 됩니다. 사람이 3 일정도 잠을 자지 못했을 때, 평소 때 아무런 의식도 하지 않고 했던 샤워나 옷 입기가 하나하나 의식해서 내 손이 잘 가고 있나? 내가 제대로 된 옷을 골랐나? 계속 의식하게 됩니다. 꼭 정신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 자신의 몸을 보고 있는 그런 느낌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느낌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끔찍한 사고를 당한 사람과 비슷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을 겪게 되면 정신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뇌와 뇌의 연결을 일부 차단해버립니다. 사고가 일부 멈추게 됩니다. 사연자분처럼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거나 깊게 생각하지 못하거나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거죠.

 

슬프게도 스트레스의 천국인 우리나라의 직장인 분들은 이 상태에서도 또 출근을 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만은 남아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뇌의 일부분을 잠시 마비시키고 출근을 하는 거죠. 엄청나게 아프고 힘든데 하루하루 생각을 멈추고 직장으로 향하는 것이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영화를 보면 사람이 번아웃으로 가게 되는 과정이 묘사됩니다. 주인공 앤디가 상사인 미란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정말 24시간 풀 대기 상태로 일을 합니다. 필사적으로 모든 일을 해내려고 하고, 결국은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죠.

처음에 그 변화는 긍정적이었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세련된 커리어우먼의 모습을 갖추고, 동료들 사이에서 출세코스로 치고 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과로가 너무 심해지자 앤디는 이윽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잃게 됩니다. 이전까지 소중하게 생각했던 애인, 친구들, 글에 대한 열정, 가치관까지 전부 잃어버리게 됩니다.

 

돈을 버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경제활동이 우리의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경제활동의 연료로 소모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경제의 톱니바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직장과 근로자는 상호 이용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거기 당신, 그 컴퓨터 전원부터 당장 끄세요.”

일과 당신은 때로는 완전히 분리되어야 합니다. 퇴근하면 더 이상 일을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이 최고로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집에서까지 일을 하면서 전두엽의 참는 힘을 혹사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멍 때리거나 좋아하는 일을 하는 그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지금 불가능한 일은 1시간 후에도 불가능합니다. 그 컴퓨터 전원부터 당장 끄세요.

 

“당신이 하루쯤 없어도 일은 자알 돌아갑니다.”

사회초년생이 하는 가장 큰 실수, 내가 없으면 직장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생각을 멈춰야 합니다. 조직이 존재하는 이유는 나 혼자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컨트롤하기 위한 것이 아닌 내가 아프고 힘들어도 누군가는 하루 정도는 나를 대신해줄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반대로 누군가가 아프고 힘들 때 내가 그들의 도움이 되어줄 수 있는 거죠.

어떤 조직이 나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건 조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조직이 아니거나 수명이 다 된 조직입니다. 언젠가는 무너져 버리겠지요. 그러니 아프고 힘들면 쉬세요. 혼자 하려고 하지 마세요. 약간은 씁쓸하지만 하루 정도라면 나 하나쯤 없어도 세상은 아주 잘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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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중간관리자라는 건 환상입니다.”

처음으로 중간관리자가 되면, 우리는 정말 심한 압박감에 빠지게 돼요. 내가 처음으로 부하직원이 생겨 권한이 생기는 것 같지만 막상 부하직원은 내 생각처럼 되지 않고 오히려 그 실수를 내가 메워줘야 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 반면에 위에서 나에게 바라는 것은 늘어날 것입니다. 권한이 없는 일을 책임져야 하는 경우가 많고, 자괴감에 빠지게 되지요,

하지만, 세상에 있는 어떤 최고의 회사원을 데려다 놓는다 해도 그 자리는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당신이기 때문에 일이 안 되는 게 아닙니다. 그 자리는 원래 그런 자리입니다. 누군가의 구멍을 커버해줘야 하는 자리이지요. 그 자리에서 나 때는 안 그랬다는 선배는 엄청난 거짓말쟁이이거나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해서 걱정하지 마세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원래 그런 자리입니다.

 

“과로도 습관입니다.”

게으름이 습관이 되듯 과로도 습관이 됩니다. 인간의 뇌는 그것에 행복한 일이건 불행한 일이건 과거의 모습을 답습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뛰어난 야구 선수가 공이 날아오자마자 생각도 안 하고 본능적으로 정해진 타격폼으로 휘두르듯이요. 습관은 추억과는 뇌의 다른 영역에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타격폼이 근육의 파열을 가져오는 방식이라면 그 타격폼은 선수의 의도와 상관없이 선수생명을 재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고의 야구선수는 슬럼프에 빠지면 잠시 타격을 멈추고 비디오로 자신의 타격폼을 체크 합니다.

직장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지금 아침에 일어나서 직장에 나가는 게 너무너무 힘든데 억지로 참고 나간다? 하지만 도저히 직장은 그만둘 수는 없겠는데 이러다 정말 언젠가 죽을 것 같다? 과로하는 습관이 있는지를 의식해보세요. 타격폼을 바꾸는 야구선수처럼요. 루틴을 벗어나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겁니다.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해 골몰하거나 머리 감싸는 대신 커피라도 한잔 하면서 바깥 풍경을 잠깐 쳐다보는 거죠. 결론 안나는 회의를 계속하는 대신 오늘 하루 그냥 멍하니 있는 거죠. 어쩌면 여러분의 노력이 부족한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잠깐만 멈추고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을 한 번 살펴보세요.

 

그리고 너무 힘들면 눈치 보지 말고 당장 연차 쓰세요. 세상 안 무너집니다. 지위도, 명예도, 자존심도, 좋은 평판도, 당신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