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Mail] 무력감과 우울감이 심해 살아갈 의욕조차 없어요

2021-11-24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 신림 평온 정신과, 전형진 전문의]

 

 

 

사연)

2년 전부터 퇴사를 반복하는 30대 초중반 여자입니다. 이직하는 곳의 경력은 없습니다.

2년 전 이직하기 전 서비스직에서 일했는데 퇴사 이유는 손님의 폭언이었습니다. "나 쟤 잘라버릴 거야. 잘리는 거 확인할 거야." 본사 사옥 내 매장이라 차장님은 손님의 말에 따라 제 잘못을 추긍하고 로테이션을 이야기하셨어요. 제 나이를 물어보셨고요. 음... 손님이 며칠 연락이 없자 로테이션도, 일하는 시간도 공간도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어요. 여전히 혼자 저녁시간에 마감을 하고 집에 갔죠. 달라진 건 제 마음 하나였어요.

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무력감. 내 열심과 상관없이 언제든 잘릴 수 있다는 무력감. 퇴사를 했고 그때 이후부터 저를 지키지 못한다고 느낄 때면 무단결근 퇴사를 합니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한 달 반. 2년 동안 그 텀을 이긴 적이 없어요. 병원을 다니든 안 다니든.

 

며칠 전에도 퇴사를 했어요. 일에 있어서는 대표님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생각하시는 건지 결국 본인이 서류를 잘 못 보신 거면서도 제게 짜증을 내시더라고요. 알고 나서도 사과를 하지 않으셨고요. 그리고 대표님이든 동료들이든 제 사적인 것들을 약점 삼아 매일 비아냥 거리셨어요. 밥을 먹는 속도, 음식의 취향. 휴일에 놀러 가는지 집에 있는지, 제가 보는 영상. 밥 먹는 시간에 제일 싫었어요. 사적인 대화가 가장 많이 오고 가고 또 다른 동료들이 타깃이 되더라도 그 동료들마저 비교치에 저를 들이밀면서 쏙쏙 빠져나가곤 하더라고요. 퇴사를 한 건 후회하지 않아요. 그런데 다시 일을 구하고 또 사람들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까 퇴사하려던 날 아침 그때의 결심이 떠올라요.

그냥 죽어버리자.

난 나 말고 지킬 것도 없으니까. 지속할 이유가 없어. 차라리 죽어버리자.

 

가족이 있으면 희생을 위해서 일을 하잖아요. 성공하고 싶으면 미래의 자신을 위해서 일을 하고요. 그런데 저는 오늘의 나 말고는 지키고 싶은 게 없어요. 어릴 때도 당하지 않던 조리돌림을 당하는 지금의 연약한 나도 싫고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느끼게요.

살고 싶은, 일을 지속하고 싶은 의욕은 어떻게 찾나요?

가족과도 사이가 좋지 않고 친구도 연인도 없습니다.

사진_freepik

 

답변)

안녕하세요, 신림 평온 정신과 전형진 전문의입니다. 사연에서 지금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는 부분들이 많이 보여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듭니다.

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말들에서 일상에서 반복적인 상처를 경험하고 있고,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의욕적으로 무언가를 시도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로 보입니다.

사연을 주신 분이 해주신 이야기에서 무력감 이외에 느껴지는 감정은 우울감입니다. 우울한 사람은 의욕이 사라지고,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주로 하고 절망감으로 죽고 싶은 충동을 떠올리게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특정 상황에서 남들보다 상처 받는 일들이 많아집니다. 상처 받는 일들이 반복되어 우울감을 경험하게 되었든, 우울한 감정으로 인해 상처를 쉽게 받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든, 지금의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면 더 나은 생활로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우선 사연에서 반복적으로 상처를 받아온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상처 주지 않는 관계가 이어지는 것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그러한 일들은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자신들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에게 조금씩 상처 주고, 배려 없는 이야기들을 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사회생활을 지속해 나가야 하니까 어느 정도 견디고 지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인격적으로 감당해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면 물러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됩니다.

하지만 사연에서와 같이 상처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반복적인 퇴사로 이어지는 과정은 장기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상처 받고 있는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들이나 사고들을 돌아보는 과정들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내가 유난히 취약한 지점에서 떠오르는 감정들이나 생각들을 연결해보고, 감정을 강하게 유발하는 생각이 있다면 점검해보는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그런 식으로 내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면 상황을 좀 더 다르게 바라보고 상황을 견뎌낼 가능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서 상처 받는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면 그 부분들을 평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후에 내 과거를 돌아보면서 그러한 생각들을 떠올렸던 경험들과 연결 지어 본다면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진_freepik

 

의욕이 생기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면, 내가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결과가 나와 연관되어 긍정적인 예측이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의욕은 생기기 어렵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지배적이라면 당연히 의욕적인 생활은 어렵습니다. 이 지점에서 앞서 언급드린 우울감에 대한 평가와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사연을 주신 분의 상황은 반드시 의학적인 개입이 필요해 보이는 상황입니다. 그와 동시에 우울증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의욕이 생기지 않는 상황 소위 말해 무기력한 상황을 개선하기 이해서는 행동을 활성화하는 방법이 많이 사용됩니다. 간락하게 언급하자면 우울감이나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게 되면 활력이 저하되고 의미 있는 행동을 하지 않거나 포기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증상을 더욱 악화시키게 되고, 증상 악화로 더 무기력해지는 일련의 흐름에 빠지게 되는데, 이를 깨기 위해 나에게 의미 있거나 긍정적인 감정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만드는 활동들을 단계적으로 수행해 나가면서, 활동 전후에 느껴지는 감정 변화를 살펴보고, 단계적으로 활동을 늘려가면서 긍정적인 기분을 획득하고 의욕을 회복하는 방법입니다.

 

정리해보면, 사연을 주신 분의 현재 상황은 치료가 필요한 수준의 우울감입니다. 가족과도 사이가 좋지 않고 친구도 인연도 없다는 언급에서 우울감은 오랫동안 지속된 문제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이러한 우울감은 의욕이나 사고, 자존감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어떠한 스트레스 상황 특히 상처 받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상황을 극복하고 견디기보다는 회피하는 방식을 선택하게 만들고, 반복된 회피는 또 부정적인 자기 평가나 우울감의 악화로 이어집니다.

결국 의욕을 저하시키고, 어떠한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도 가지기 어렵게 만듭니다. 앞서 언급한 나를 힘들게 만드는 생각과 감정에 대한 평가를 통해 상처를 돌아보고, 행동 활성화를 통해 의욕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조차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힘든 상황에서는 약물치료와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사연을 주신 분의 자세한 배경을 알기 어려워 제한적인 수준으로 도움을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쪼록 어려움에서 벗어나 조금 더 밝은 삶을 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