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Mail] 가족의 평화를 찾고 싶어요
[정신의학신문 : 임지섭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저는 아빠와 엄마 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 장녀입니다
저희 집은 겉으로는 화목하고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어 보이나
속은 점점 썩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불과 2~3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이었던 2019년 저희 집은 이사를 했고 저희 엄마는 동호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호회 안에서 일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아했고 2020년에는 수많은 일이 엄마에게 다가왔습니다. 외할머니와 같이 살아야 했고 매일같이 싸우며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스트레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가시고 얼마 안 있다 윗집에서 우리 집을 보는 것 같다, 우리 집 욕을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저보다 집에 오래 계시기에 낮에 그런 말을 들었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저희와 이야기를 하다가 들린다고 하고 짜증을 내고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저희 아빠는 엄마에게 정중히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자고 말을 했고 엄마와 아빠는 정신과에 갔습니다.
가서 진료 및 상담을 받은 결과 정신병일 수도 있다는 판단을 받고 약을 처방받았습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은 약물치료로 나아지지 않는다면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엄마는 일주일 정도는 약을 먹는 듯했고 그 사이에는 별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는 약도 먹지 않았고 병은 심각해졌습니다.
저희 가족은 이제 지칩니다... 아빠는 시간 날 때마다 엄마랑 같이 밖으로 나가서 놀다가 오시지만 나아지는 것은 그때뿐 다시 심각해집니다. 그리고 나갔을 때도 늘 사람들의 시선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희 가족의 평화로운 모습을 다시 한번 보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엄마가 자신이 병에 걸려있다고 생각이 들게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지금 못 듣고 안 들리는 제가 이상한 걸까요...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임지섭입니다.
올려주신 사연 잘 읽어 보았습니다. 글을 올리시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으셨을지를 생각하면 이렇게 답변을 적는 것도 걱정되고 우려됩니다. 우선, 어머님께 생긴 환청, 망상, 감정조절 문제, 그리고 치료를 받지 않는 병식 문제로 인하여 질문을 주셨네요. 장녀로서 많은 고민과 걱정 속에서, 불안하고 힘드실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신경 쓰시는 소리를 들어보려고도 하셨던 것 같고, 어쩌면, 이러한 환청과 망상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설득해보려 하기도 하고, 어떻게든 병원까지 가보자고 많은 노력을 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잘되지 않으셨던 것 같고요.
우선, 본인에게 병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병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정신질환에 대한 병식이 없는 것은 매우 흔한 현상입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정신질환은 생물학적으로는 뇌의 질환이고, 이러한 뇌의 문제로 인하여,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를 질병 인식 불능증 (anosognosia)이라고 합니다.
이는 정신증상에만 국한된 증상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본인의 눈으로 보이는 문제에 대해서 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며, 명백히 모순되는 증거에 직면해도 질병을 부인하게 됩니다. 이러한 질병 인식 불능증은 망상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역시 뇌의 생물학적인 질병상태로 인한 증상이라는 것을 보호자분께서 이해하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많은 보호자분들께서 환자분을 설득하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환청과 망상을 직면시키기도 하고, 논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환청은 환자분들께는 ‘실제 경험’의 일부이며, 망상은 ‘합리적인 증거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매달리는 고정된 믿음체계’이기 때문에, 환청이나 망상을 설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증상을 직면시키고 설득을 반복할수록 환자분들은 증상을 숨기거나, 주변 사람들조차도 적대적으로 대하게 됩니다. 한마디의 말로 환자분을 일깨워 주는 것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실제로는 역효과만 생길 가능성이 높기에 주의해야 합니다.
오히려, 환청이나 망상적 이야기에 대해서는 앞으로는 그저 들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어떤 이야기도 편하게 하실 수 있도록 듣되, 망상적 내용에 대해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망상적 내용들로 인하여 어머님 본인이 힘들어하시는 부분과 감정에 공감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스스로 병원을 오시는 많은 환자분들이 망상에 대해서는 치료받으려 하시지 않지만, 이러한 증상과 관련돼 불안, 불면, 우울, 과민성과 같은 다른 면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치료를 받으려 하시는 경항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머님께서 해당 증상과 관련하여 잠을 잘 못 잔다 / 신경 쓰이고 예민해진다 / 화가 난다 / 우울하다 와 같은 말씀을 하신다면 이에 공감하며, ‘불면증에 대해서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면 어떠하냐’, ‘요즘에는 스트레스 상담 때문에도 정신건강의학과에 많이들 간다’와 같은 방식으로 치료받는 것을 권해보는 것이 좀 더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신과 치료를 통해서 본인이 이와 같은 증상들에 도움을 받는 경험들이 치료의 물꼬를 틔우는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을 추천드리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 - 리베카 울리스저 /강병철 역
질문자님의 고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