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박스 ; 볼 수 없다는 불안감 – 1편
정신과 의사와 함께 보는 넷플릭스
[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볼 수 없다는 불안감
오감 가운데 가장 필수적인 감각 하나를 꼽으라면 무엇일까?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건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각을 꼽곤 한다. 오감 가운데 가장 잃기 두려운 감각 또한 시각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공포스럽고 절망스럽다.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관객을 불안하게 만드는 손쉬운 연출법은 주인공의 눈을 가리는 것이다. 주인공의 눈이 가려지는 순간 관객은 무의식적인 답답함과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 주인공을 보면서, 보이지 않음 그 자체의 두려움을 바라보게 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의 스테디셀러 [버드박스]는 볼 수 없는 존재로부터의 생존을 다룬 스릴러 영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종일관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영화에서는 뭔가 초자연적이고 거대한 존재가 등장하는데, 그 존재는 사람들을 미쳐서 자살하게 만드는 괴물이다. 사람들은 그 괴물을 단지 바라보기만 해도 곧바로 자살하게 된다.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두 눈을 질끈 동여매고, 창문을 꼭꼭 닫아 커튼을 쳐야만 한다. 관객 역시 끝끝내 그 괴물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본다’는 것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갑갑하고 불안하다. 반면,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록 미치도록 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마치 공포 영화를 볼 때 두 눈을 손으로 가리면서도 손가락 틈으로 몰래 귀신의 모습을 훔쳐보게 되듯, 볼 수 없을 수록 보고 싶어지는 아이러니가 더해진다. 버드박스를 볼 때에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괴물의 모습이 미치도록 궁금해진다. 우리는 왜 그렇게 ‘보이는 것’에 집착하게 될까.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다른 감각들에 비해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보는 것은 눈의 망막을 통해 들어온 빛의 정보를 파악하는 과정이다. 책상 위의 사과를 '본다'는 것은 사과에서 반사된 빛을 인지했다는 뜻이다. 실제 사과가 내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빨간색 영역의 파장을 갖는 전자기파가 망막에 둥근 모양으로 맺히는 과정일 뿐이다. 흥분된 시신경의 전기신호가 뒷통수의 시각 담당 뇌세포들로 전달되는 과정이다. 그 과정 어디에도 사과라는 실제 과일은 없다. 하지만 그 이후 복잡한 어떤 과정을 거치며 우리의 의식에는 '사과'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 때에야 우리는 사과가 눈 앞에 있음을 인지한다. 그리고 '사과를 본다'라고 느낀다. 다시 말해, 눈 앞의 사과를 '본다'라는 과정은 이미지를 통해 눈 앞에 사과가 있음을 ‘인지’하는 과정이다. 망막의 시신경이 감지한 빨간색 파장의 형체가 사과라는 대상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영어 문장에서 "I see" 는 '알겠어' '이해했어' ‘받아들였어’라는 뜻이다. '보다'라는 뜻의 동사 ‘see’는 무언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만큼 우리는 세상을 이해할 때 그 무엇보다 ‘보는 것’에 가장 많이 의존하고 있다. 우리는 눈으로 보아야 이해할 수 있다. 그래야 받아들일 수 있다. 심지어 시각을 잃은 맹인들조차도 무언가를 ‘본다’. 맹인들은 눈으로 보는 대신 청각을 통해 주변의 사물을 파악하곤 하는데, 그 때에 그들 뇌 MRI를 촬영해보면, 시각을 담당하는 후두엽의 피질이 활성화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우리의 뇌는 본질적으로 보아야만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하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버드박스]의 ‘볼 수 없음’이 그토록 불안한 이유는 원천적으로 이해를 차단 당하기 때문이다. 명확한 실체가 파악된 위협을 ‘공포’라고 한다면,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위협은 ‘불안’으로 다가온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끊임 없이 불안해 하는 이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불안해하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다. 두려움의 대상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안의 실체
“모르겠어요. 그냥 불안해요”
“뭐가 불안한지 저도 모르겠어요”
불안하다고 말하는 공황장애 환자들에게 ‘무엇이 그렇게 불안하신가요?’라고 질문하면 이런 대답을 흔히 듣게 된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왜 공황발작이 생기는지 알 지 못한다. 그냥 어느 순간 갑자기 심장이 터질 듯이 뛰며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특히나 처음 공황발작을 경험하게 될 때의 그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지금의 이 증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죽음의 공포,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다.
공황장애 환자들은 공포의 명확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막연히 두려운데, 그 대상이 눈에 보이질 않는다.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알 수 없고, 알 수 없으면 맞서 싸울 수 없다. 그저 도망쳐야만 한다. 그래서 공황장애 환자들은 대부분 회피하게 된다. 조금이라도 불안하고 두려운 곳들은 아예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지하철을 타지 않고, 엘레베이터를 타지 않는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이 있으면 한참을 돌아서라도 피해간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를 피하고, 누군가를 만나도 마음을 열기 어렵다.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조차 어려워진다. 불안에 새파랗게 질린 마음은 어떤 대상을 내면화하고 이해하기를 포기한다. 아니, 포기한다기보다 차단한다. 살아남기 위해 차단한다.
#살아남기 위해 차단한다.
[버드박스]의 주인공 멜로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녀 또한 이해할 수 없는 불안에서 도망치고자스스로 고립된다. 그녀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괴물은 공포와 불안의 화신이다. 괴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그녀는 눈을 가리고 집 주변에 울타리를 세웠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과 올림피아의 딸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다. 아이들이 다섯살이 되도록 여전히 소년(Boy), 소녀(Girl)이라고 부르며 깊은 관계 맺기를 거부한다.
볼 수 없는 괴물은 멜로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내면화시켰다. 그녀에게 생존이란 곧 바라보지 않는 것,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되었다. 그녀는 다른 대상, 다른 사람, 다른 무언가를 받아들이기를 차단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심지어 자신의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두 눈을 동여매 가림과 동시에 그녀의 마음에도 가림막이 내려졌다.
#보이지 않는 것을 들여다 보는 법
인지행동치료는 공황장애 치료법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것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인지치료의 핵심은 불안에 질려버린 나머지 모든 것을 차단해버린 공황장애 환자들에게 일상을 다시 올바르게 인지하도록 훈련시켜주는 데에 있다.
공황이 무서워 출근길조차 두려워한다면, 정말로 출근길이 어떠한지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정말로 엘레베이터와 지하철이 나를 공황으로 이끄는지, 그렇다면 그것들의 어떤 점이 그러했는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른 무엇들이 있었는지, 그 때에는 어떤 감각이 느껴졌는지, 어떤 생각들이 떠올랐는지, 어떤 생각들이 나를 더 큰 불안으로 이끌어가는지 질문함으로서, 과연 무엇이 정말로 불안을 일으키는지, 그 불안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냉철하고 분명하게 따져보는 것이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두려움을 들여다보기 위한 훈련이다. 공황 그 자체의 정체가 직접 보이지 않는다면 당시의 정황이나 신체 감각, 생각, 감정 등과 같은 주변을 살펴봄으로써 천천히 힌트를 얻어 볼 수 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괴물의 접근을 알아차리기 위해 새장(버드박스-Bird Box)을 들고 다니는 멜로리의 모습처럼 말이다. 멜로리 또한 보이지 않는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훈련하며 여전사로 거듭난다. 두 눈을 가린채 버드박스를 들고 다니며 숲속과 급류를 파헤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툼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와 자토이치를 섞어 놓은듯 관객의 시선을 빨아들인다.
* <2편>에서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