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ing’ 하는 시간 [불안, 나를 태우는 또 다른 나 - 4]

불안, 나를 태우는 또 다른 나 (4)

2021-07-21     채정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 채정호 가톨릭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 대한불안의학회회장] 

 

‘being’ 하는 시간

인간이 잘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누구나 존재론적 고민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회사에서 일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본인이 왜 회사에 다녀야 하는지,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 이 일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인지, 원래 어떤 일을 하고 싶었는지, 나는 누구인지. 이는 굳이 회사나 직무의 이유가 아니라도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그 누구든 해보았을 고민이다. 인간은 자기 존재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이 던진 질문에 명확한 답변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실존과 개인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불안’을 극복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하기 위해 살았는지’, ‘내가 무엇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인지’ 알 방법으로 ‘Being’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인생의 대부분을 무언가 갖거나 하기 위해 사용한다. 즉 ‘Being’한 시간이란 ‘Having’, ‘Doing’을 하지 않는 시간을 말한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명상이 있다. 하루를 시작할 때 한 자리에 머무르며 나의 존재를 생각해보고 가만히 있는 것이다. 나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는 자연이 있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나 자신이 별 게 아닐 수 있음을 깨닫는다. 호텔처럼 사람이 만든 멋있는 곳에 있으면 우리는 소유욕이 생긴다. 그런 마음이 들면 다시 ‘Having’을 하고 싶어져서 일을 추구한다. 자연은 이와 다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노력해서 유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 속에서 ‘바위는 무엇인가?’, ‘새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등 현존의 시간을 느끼며 나의 존재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게 좋다.

 

사진_freepik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살아있어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를 생각할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만 하며 그 장소는 꼭 자연이어야 하는가? 물론 아니다. 중요한 것은 ‘존재하는 느낌’이다. 도시에서의 방법을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러하다. 우리는 어딘가로 향할 때 무엇을 보고 생각하며 걸을까? 대부분은 오늘 해야 할 일을 생각하거나, 도착 시각을 예측하며 시계와 휴대폰을 들여다볼 것이다. 우리는 습관처럼 자꾸만 그런 쪽으로 빠지게 된다. 당장의 시간에 쫓겨 살아가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한 걸음만 떨어져서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데 나 말고 또 무엇이 있는가를 돌아봐야 한다.

나의 경우, 병원 입구에 소나무가 열 그루가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깨달았다. 놀랍게도 병원에 다니는 십여 년 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를 알아차린 계기는 스스로 현존하는 느낌을 많이 가지려고 노력한 결과이다. 열 그루의 소나무는 그 자리에 소나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일일이 개수를 세어봐야 알 수 있다. 그리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 어떤 소나무가 제일 큰지, 제일 구부정한 건 몇 번째인지를 들여다보는 중이다. 이처럼 주위에 귀를 기울이며 머무르면 ‘아 내가 여기 있구나, 내가 다른 곳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구나’ 경험으로 알 수 있다. 내가 어느 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점이 좋을까? 

역시나 나의 경우 소나무로 예를 들 수 있다. 병원 입구에 있는 열 그루의 소나무는 같은 시기에 심은 것으로 다 비슷하게 생겼다. 하지만 신경을 쓰다 보니 일 송이, 이 송이, 삼 송이 소나무를 모양으로 구분하고 이름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중 삼 송이의 껍질이 다른 나무에 비해 유난히 벗겨진 게 눈에 띄었다. 한 번 눈에 들어온 것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다음부터 나는 삼 송이의 껍질이 얼마나 더 벗겨졌는지, 상태가 호전되지는 않았는지 신경 쓰게 되었다. 즉, 내가 있는 자리에 머물면서 동시에 소나무와 연결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이 소위 이야기하는 자연과의 연결이나 세상과의 연결은 대단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다른 존재를 통해 내가 존재하는 느낌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살아갈수록 점점 외로워지고 고립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대인관계에 국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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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관계가 어렵고 친구가 많이 없는 것을 당사자의 탓으로만 말할 수는 없다. 치료를 목적으로 내원하는 분 가운데 대인관계 문제를 고민하는 분에게, 나는 나무하고도 친구를 해보라고 말한다. 지하철에서 나와 첫 번째로 보이는 플라타너스와 평생 친구를 해보자고. 나는 위에 말한 삼 송이와 친하다. 퇴근할 때 아무도 내게 인사를 해주지 않아도 삼 송이는 인사를 해준다. 이런 말을 하면 ‘저 사람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나’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삼 송이와 굉장한 연결감을 느끼는 것이다. 연결감은 나의 존재감을 높여준다는 면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사소한 것들과 연결되고 그로 인해 내가 여기 머무르는 느낌, 또한 그것과 같은 존재로서 있는 느낌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사람들이 반려견을 키우자고 할 때 나는 반려 돌도 나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말 그대로 돌멩이를 말한다. 돌을 하나 가지고 다니면서 정말 돌에게 사랑을 주고 친해지는 방법을 제시한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도, 돌과 친분을 가지며 현존하는 느낌과 생각이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다시 본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산다는 건 무엇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이 자리에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게 중요하다. 산다는 느낌을 받는 방법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나를 ‘지금, 여기’ 현실에 두면 된다. 문제는 우리가 다른 것들에 주위를 잘 빼앗긴다는 것이다. 앞으로 해야 하는 일, 오늘 당장 할 일에서 생각과 주위를 거두어 내가 지금 있는 자리로 가져오자. 내 삶과 나라는 존재가 훨씬 괜찮아질 것이다.

 

현존, 사소한 습관으로 만들기

불안을 없애기 위해 ‘Being’의 시간을 가지려는 사람들은 이런 질문에 직면할 수도 있다. ‘Being’의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having’ 하고 ‘doing’에 썼던 다른 시간을 양보하면 또다시 불안하지 않을까? 어떻게 시간 조절을 해야 할지, 시간 낭비가 아닐지 생각만 해도 불안하고 마는 것이다. 불안하지 않기 위해 시도했던 방법이 또 다른 불안을 일으키는 것은 ‘버릇’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Being’ 하는 시간의 가치와 방법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아무리 바빠도 진료 시간을 지킨다. 아주 중요한 사람하고 만나는 약속 또한 지킨다. 타인과 약속을 했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지키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명상하는 시간, 현존하는 시간은 잘 지키지 않는다. 약속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 남아서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그 어느 것도 지키지 못한다. ‘having’과 ‘doing’은 보상이 생긴다. 하지만 현존에 머무르는 시간은 처음에 보상하는 게 없다. 눈앞에 주어지는 보상이나 목표가 없으니 실천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약속해야 한다.

처음에는 5분만 하면 된다. 눈 감고 머무르는 시간으로만 시작해도 된다. 이를 1분, 5분, 10분, 15분 늘려가는 것이다. 가만히 그 자리에서 멍하게 있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에, 보통 15분까지가 고비다. 그 뒤에는 시간이 정말 잘 간다. 5분에서 15분으로 시작해 30분, 1시간으로 늘리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시작부터 이렇게까지 늘리는 걸 각오할 필요는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매일의 훈련과 연습이다. 하루 중 실천할 수 있는 시간을 꼭 잡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약속이다. 아침에 일어나 양치를 하고 대변을 보는 것처럼 기본적인 생리 활동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한 달 정도 하면 사람의 몸은 쉽게 버릇이 들기 마련이다. 그 자리에 앉아 머물고, 그 자리에 있는 자신을 느껴보는 시간을 가장 중요한 약속으로 여긴다면 어느새 사소하지만 당연한 습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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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챙김’의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그 자리에 머물고 느끼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 번째는 ‘나의 주의를 자리에 둘 줄 아는 것’이다. 현대에서는 명상을 ‘주의 훈련’이라고 한다. 즉 나의 주의를 갖고 오는 훈련이다. 주의는 마음과 같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자꾸만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기 십상이다. 작은 소리에도 ‘밖에 무슨 일이 있나?’ 하는 생각으로 가버린다. 내 주의를 내가 있는 이곳에 가져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주의를 머무르게 하기 좋은 방법으로 호흡이 있다. 들숨 날숨에 주의를 갖고 오고 그다음에 발바닥에 닿는 느낌, 엉덩이에 닿는 느낌 등 내 몸으로 주의를 가져오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알아차리는 것’이다. 알아차림을 통해 내 주의를 빼앗긴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의가 ‘내 생각으로 갔구나’, ‘지금 밖에서 나는 소리로 갔구나’ 등을 알아차리고, 다시 주의를 돌아오게 하는 것. 이 반복이 바로 ‘마음 챙김’이다. 즉, 마음 챙김의 가장 기본 훈련은 ‘주의’와 ‘알아차림’인 것이다. 내가 있는 이 자리에 주의를 가져오고, 주의를 빼앗겼다면 그 사실을 알아차린 후 다시 가져온다면 마음 챙김 명상을 할 수 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내 마음에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건 굉장한 힘이 있다. ‘유튜브(YouTube)’에 알고리즘이 있어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 그와 관련된 음악이 추천되고 이어지는 것과 같다. 주의와 알아차림을 반복하면 내가 평상시에 어떤 버릇이 알 수 있다. 또한 무엇을 가질까, 무엇을 할까 하는 식으로 돌아가던 알고리즘이 멈추고 주의와 알아차림의 알고리즘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일상생활에서 5분으로 시작했던 것이 습관처럼 작동하게 된다.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나의 소나무 일화처럼 평상시에 작동이 가능해진다. 내가 다른 것에 주의를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알아차리는 능력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듯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를 아는 것만으로 그동안 사고의 중심에 있던 ‘having’과 ‘doing’에서 벗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