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Mail] 부정적인 말에 너무 익숙해졌어요

2024-11-01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 사당 숲 정신과, 최강록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20대 여성입니다. 제목 그대로 제 자신이 부정적인 말에 너무 익숙한 거 같습니다. 일단 부모님이 말을 험하게 하시는 편이시고요, 저에 대한 불만이 가득 쌓이시면 소리를 치시며 모욕적인 말을 내뱉으십니다. 강한 어조의 연달은 욕설은 기본이고,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도 많이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부모님을 미워하는 건 아닙니다. 화가 나셨을 때를 제외하고는 저에게 행동으로 다정하신 부모님이라 저 역시 없는 형편에 저를 지지해주시고, 늘 저를 먼저 챙겨주시는 게 감사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가끔 세상에서 역시 제 편은 부모님밖에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문제는 '행동'이 좋으시지 '말'이 너무 험하십니다. 저의 편을 들어주시고, 공감하고, 배려를 하는 말을 하시는 편은 아니세요. 가볍게 예시를 하나 들어보자면, 제가 어릴 적 생일 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했을 때, '저런 게 왜 필요하냐', '그런 걸 뭐하러 먹냐', '돈이 아깝다', '사치다' 등의 제 바람을 평가 절하하는 말을 하시다가도, 매년 제가 말하지 않아도 먼저 생일 케이크를 사서 준비해주시는 식입니다. 성인이 된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챙겨주십니다. 저도 어릴 적에는 이런 말들을 들으며 정말 제가 바라는 게 부적절한 건지, 부끄러운 말을 한 건지, 제가 이상한 건지 등의 생각으로 마음이 차이고 상처를 받았던 거 같은데, 이제는 행동과 말이 따로 노는 부모님에게 너무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합니다.

 

사진_freepik

 

문제는 제가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말들을 듣고 커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인 말(비난, 조롱, 돌려 말하기 등)을 너무 쉽게 들어 넘기는 거 같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욕하고 상처 주고 싶어서 뱉은 말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요. 그리고 크게 타격을 받지도 않습니다(이게 좋은 건지 모르겠네요) 사실 주변의 부정적인 말에 익숙한 건 정말 부모님이 원인인 건지, 어릴 적 이어졌던 학교폭력(왕따) 때문인 건지 모르겠습니다. 둘 다 일수도 있겠네요. 그때부터 남의 말을 흘려듣는 안 좋은 습관이 생겼습니다. 또 저 역시 제 기준에서는 이 정도의 말, 장난은 괜찮을 거라 생각해서 이야기했는데, 그게 상대에게는 상처이거나 부정적이고 부적절한 말로 들리는 경우가 꽤 있는 거 같습니다.

경험으로 드는 생각은 다른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하는 말 (특히 긍정적인 쪽)과 제가 통상적으로 하는 말(대체로 부정적입니다)이 꽤 큰 간극이 있고, 또 제가 부정적인 말에 너무도 익숙하다는 겁니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요? 어쩐지 사람들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자주 말에 상처를 받고, 서로를 배려한 말을 하고, 신경을 쓰는 거 같아요. 저만 부정적인 말을 그냥 들어 넘기고, 누군가 저에게 언성을 높이고, 강한 어조로 이야기하는데에 익숙해지는 거 같아 걱정이 됩니다. 원래도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자신감마저 떨어졌어요. 가족이라면 모르겠지만, 저 역시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데, 이런 부정적인 언어 습관과 흘려듣는 귀를 가지고 있어도 괜찮을지 고민입니다.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의 사연 잘 받았습니다.

글을 읽어보니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부모님의 부정적인 언어에 노출이 되셨네요.

욕설도 참 많이 들어오셨고요,

이중 메시지(Double Message)라는 용어를 들어보셨나요?

말의 내용이나 목소리, 표정으로 드러나는 표현들이

서로 모순되는 메시지를 의미합니다.

사연자님의 부모님이 아주 대표적으로 사용하고 있으시지요.

언어와 행동이 불일치한 부모님의 화법은

자녀를 굉장히 힘들게 하고 혼란을 주는 의사소통 방식입니다.

 

이러한 이중 메시지를 들어오면서,

당시 사연자님은 ‘내가 바라는 게 부적절한지, 부끄러운 말을 한건지

내가 이상한건지?‘라는 생각들로 상처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어린 마음에 대단히 혼란스러우셨을 겁니다.

정작 혼란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부모님이지만,

이를 분석하고 이해하고 소화하는 버거운 몫은 사연자님이 해야 했지요.

상호 모순되는 메시지를 받으면

마찬가지로 상호 모순된 감정이 동반됩니다.

우리가 보통 양가감정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처음 키워보기에 서툴 수 있습니다.

자식들에게 일관되게 반응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요.

의도하지 않아도 감정적인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자녀가

부모님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감사하고 또 사랑하는 마음도 있지만

한편, 불편하고 답답하거나 화난 마음도 공존할 수 있지요.

이러한 양가감정은 잘못된 현상이나 문제는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 부모님과 물리적 거리나 심리적 거리를 두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결되기도 하고요.

서로 참았던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결국 부딪혀 해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연자님네 가족의 경우에는

오래된 소통 문제를 덮고, 회피하는 쪽으로

서로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듯합니다.

사연자님이 이 모두를 감내하고 포기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글 처음에 사연자님은 부모님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제가 보기엔 미워하는 감정을 억압하신 게 아닐까 합니다.

보통 화나 미움과 같은 감정은

상대방과의 아주 적극적인 소통을 요구합니다.

이때 만약 상대방이 말을 세게 하는 타입이라면,

그 앞에서 똑같이 표현의 강도를 높이기는 참 어려워집니다.

피 튀기는 전쟁을 치러야 할 수 있으니까요.

심적인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하고,

감정 표현이 격해지다 보니 상처도 더 크게 받을 수 있습니다.

 

사진_freepik

 

사연자님의 가정은 감정 표현을 안전하고 차분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사연자님은

부정적인 감정을 삼키거나,

아예 작은 감정으로 만들어 눌러버리는 것이

차라리 평화로운 방식이라는

무의식적인 판단을 했을지 모릅니다.

사연자님이 부정적인 언어 표현에 익숙해졌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가족 말고도

누군가가 비난, 조롱을 할 때

대수롭지 않게 쉽게 넘긴다고 하셨는데요.

나름대로 자신을 보호하는 전략이기도 했을 겁니다.

또한 당장을 갈등은 피할 수 있어서

일시적인 평화도 주었을 겁니다.

 

그래도 상처 받은 것은 상처 받은 것입니다.

특히 말로 상처 받는 것은 신체 폭력만큼,

때로는 더 큰 위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상대방의 표현에 대해

자신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생각하거나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나중에 어떻게 될까요?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대인관계 영역에서는

서로 깊이 있는 진실한 소통이 어려워지고,

오해하는 일들이 쌓인다는 것입니다.

개인에게 일어나는 문제는

점차 자신의 감정에 둔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게 그러려니 넘기고 이해로 덮다보면

전체적으로 상처가 어떤 크기인지 모양인지

스스로 알지 못하는 둔한 상태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사실 건강한 자존감의 바탕에는

자신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전제됩니다.

자기 생각과 감정에 대해 잘 정리하지 않으면

자신감 있게 표현하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자신감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사연자님이 그동안 받은 상처를 정리하고

감정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합니다.

혼자 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해보겠습니다.

  1. 누군가에게 상처 받은 말들을 기억나는대로 모두 적어보도록 하세요.

  2. 그리고 그 당시에 손상된 욕구들을 적습니다.

매슬로우 이론에서는 다섯 가지 욕구를 언급합니다.

생리적 욕구, 안전과 안정에 대한 욕구,

애정과 소속감에 대한 욕구, 존중과 인정에 대한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3. 그 말을 들었을 때 떠오른 생각과 감정을 적습니다.

  4. 이어서 내가 상대에게 듣고 싶었던 말과

비록 삼켰지만 정말 하고 싶었던 말도 적어봅니다.

사연자님, 이렇게 연습해도

당장 부모님의 말 습관은 쉽게 변화하지 않고

어김없이 반복될 겁니다.

하지만 나의 표현 습관이 변화하는 것이 연습의 핵심입니다.

뒤늦게라도 제대로 표현하는 연습을 반복하게 되면,

나중에 또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다르게 반응할 수 있는 선택지가 보이게 됩니다.

앞으로 사연자님이 자신의 상처를 좀 더 존중하고

기억하고, 치유해나가는 작업을 하시면서

자신감도 회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 최강록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