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Mail] 뭘 하든 행복하거나 즐겁지가 않아요

2024-12-16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 사당 숲 정신과, 최강록 전문의] 

 

사연)

저는 30대 여성 직장인입니다. 오랫동안 취업이 되질 않아 고생하다가 몇 년 전 너무나도 운 좋게 목표하던 회사에 취직했어요. 기적 같은 일이었기에 가족들도, 주변 사람들도 대단하다며 저를 추켜세워줬고 저도 제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껴지고 엄청 기뻤습니다.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그런데 요즘 저는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렵게 취직한 회사여서인지 동료들에게 뒤쳐지기 일쑤에다 끝없는 경쟁과 평가 속에서 숨이 막혔어요. 꿈꾸던 일이었지만 막상 일해보니 업무 성격이 제 성향이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집이 가난하기도 하고 여러 상황상 일을 그만두거나 이직할 순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꾸역꾸역 살고 있어요. 이 어려운 시기에 남부럽지 않은 직장에서 돈벌이할 수 있는데 감사하는 마음은 진심이거든요. 제 오랜 꿈이기도 한 일이고요.

다만 제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 같아 이런 상황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우려스럽습니다. 저는 아주 어릴적부터 불안이 심해 엄마와 떨어지지 못했고, 항상 울었고, 학창시절에는 그 시절 전부나 다름없는 교우관계도 잘 해내지 못했어요. 당시 불안하고 우울한 마음에 밥도 잘 먹지 못해 살도 엄청 많이 빠졌습니다.

 

어른이 되면서 슬픈 마음을 이겨낼 수 있는 맷집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우울한 증상 같은게 더 또렷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아무 일이 없어도 죽고 싶단 생각을 자주 합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정말 모르겠거든요. 감정이 둔해지면서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순간이 대부분입니다.

없던 무기력까지 더해져 침대에서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면 하지 않습니다. 모든 걸 미루고 떠넘기고 날 나쁘게 평가하든 말든 신경도 안씁니다. 사람을 만나면 누가 됐든 감정 소모가 심해 잘 안만납니다. 그냥 잠만 자고 싶어요.

학교에 다니고 취업을 준비할 땐 죽지 못해 살아야 하니 지금 삶이 더 불행해지면 견딜 수없이 힘들 것 같아 뭐라도 했습니다. 지금은 목표도 없고 목표를 만들기도 싫고 의미도 모르겠습니다. 남들이 말하는 의미 하나도 공감이 안됩니다.

 

사진_freepik

 

전 지금 뭘 해도 행복하거나 즐겁지 않습니다. 취미도 없고 낙도 없습니다. 가지고 싶은 것도 가보고 싶은 곳도 없어요. 전 지켜야 할 것도 없고 미래가 일절 궁금하지 않습니다. 내일이라도 그냥 이 삶을 끝내고 싶어요. 아무런 후회도 미련도 없습니다.

여행도 가보고 저를 위한 투자도 해보고 좋아하는 일도 해봤지만 결과는 늘 똑같았어요. 잠깐 좋을 뿐 다시 끝없는 우울감이 들고 자살을 생각합니다. 죽은 저를 보며 슬퍼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상관없어요. 솔직히 제 알바 아니고 신경 쓰이지도 않습니다.

저는 정신과 치료를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 상태가 대체 무엇인지 궁금하긴 하네요. 죽을 용기 없이 이대로 내내 불행하게 살아야겠죠. 그래도 이곳 신문에 올려주신 글을 읽으며 많은 위안을 받아 이렇게 글을 남겨봅니다.

횡설수설한 글이지만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사연 잘 읽어봤습니다. 이곳에 글을 남기기까지 사연자님의 삶에 정말 많은 일이 있었네요. 취업준비에 열심히 매진하다 드디어 직장을 구했는데, 고생 끝이라는 안도감도 잠시, 맞지 않는 업무, 뒤쳐지는 상황, 비교와 평가 속에서 많은 불안과 압박도 경험하셨을 텐데요. 글을 찬찬히 읽어보니 사연자님이 많이 지쳐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도 전혀 없는 ‘무망감’, 그리고 계속 잠만 자고 싶고 모든 것이 버거워서, 예전에는 쉽게 했던 행동도 다 놓게 되는 ‘무기력감’. 이 두 감정은 우울 증상에 동반되는 대표적인 감정들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상태가 궁금하다고 하셨는데요. 오늘 마음우체국에서는 사연자님이 스스로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를 소개하겠습니다.

 

사연자님은 마음챙김(Mindfulness)에 대해서 혹시 들어보셨나요? 현재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명상 방법론이자 치료 기법이기도 합니다. 마음챙김에서는 우리 마음이 경험을 처리하는 데 두 가지 모드를 사용한다고 설명합니다. 바로 행위 모드(Doing Mode)와 존재 모드(Being Mode)입니다. 행위 모드는 목표지향적이고 문제 지향적인 특징을 가집니다. 지금 상태와 다르게 만들려고 애쓰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 쉽게 말하면 원하는 상태에 도달하거나 혹은 원치 않는 상태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는 현재 상태에 대한 불만족감을 필연적으로 느끼게 합니다.그리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끊임없이 행위 모드가 작동하도록 만듭니다.

존재모드는, 마음챙김 그 자체입니다. 마음챙김이란 의도적으로, 현재 순간의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아차림, 스스로에 대한 친절함, 경험에 대한 차별 없는 수용, 너무 애쓰지 않음을 특징으로 작동하는 모드입니다.   

(참고 『마음챙김에 기반한 인지치료』, Rebecca Crane, 학지사, 2019)

 

사진_freepik

 

사연자님의 고민 글을 보니 그동안 목표지향적인 일상으로 가득 채워 살아오셨구나 감탄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실천한 행동들이 아주 많았거든요. 그런데 행위모드를 중심으로 지나치게 열심히 살다 보니 지금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만나게 된 것 같습니다. 미래를 위해 목표지향적으로 사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목표지향적인 ‘행위 모드’는 사실 장점이 무척 많습니다. 목표를 달성하면 성취감이나 행복감과 같은 일시적이지만 강력한 ‘보상’도 주어집니다. 그리고 일상을 계획으로 통제하는 과정에서 불안감이 줄어 심리적 안정감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연자님은 어린 시절 불안을 많이 느꼈다고 하셨습니다. 불안에 취약한 성향을 가진 분들은 불안을 처리하기 위해 다양한 대처를 시도합니다. 사연자님의 목표지향적인 삶의 방식이 그동안 어느 정도 불안을 다루는 데 도움된 부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행위모드만으로 작동되는 삶을 살면, 목표 추구 행위에 대한 보상이 제때 주어지지 않을 때 정서적인 고통감을 필요 이상 크게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또한 ‘공백이 있고 방향 없이 잠시 멈춰 있는 시간’을 견디기 어렵게 됩니다. 멈춘 삶을 어떻게든 변화시켜야 한다는 압박이 생기면서 다시 끊임없이 새로운 목표를 세우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 , ‘나는 문제가 있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지향적인 행위모드를 다시 작동시키려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문제 상황으로 구성하면서, 온갖 부정적인 감정도 파생됩니다.

 

사연자님은 ‘뭘 하든 행복하지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표현에서 ‘무언가를 <해야만>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무의식적인 전제가 깔려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행복감을 느끼려면 ‘행동한다’는 선행 조건이 필요하다는 느낌이랄까요? 실제로 여행, 좋아하는 일, 자기를 위한 투자 등 많은 행동을 실천하셨습니다. 얼마나 애를 많이 쓰셨는지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애쓰는 노력은 사실 ‘우울에서 벗어나 다시 행복을 느끼겠다’는 행위모드가 작동한 것입니다. 행복감은 다른 감정과 마찬가지로 휘발성이 강하고, 아주 일시적인 체험이라는 점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24시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행복을 위한 선행 조건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고, 우리가 언제든지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꼭 어딘가 도달하고 무언가를 해야 얻는 감정이 아니라는 의미죠. 처음에 말씀드렸던 존재모드, Being Mode로 삶을 살아간다면 행복감을 수시로 경험하는 게 가능합니다.

 

사진_freepik

 

사연자님이 그동안 성실하게 유지해온 행위 모드를 내려놓고 뭘 해야 할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지금 상태가 참 혼란스럽고 싫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모드로 삶을 살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타이밍을 만난 것입니다. 사연자님은 취업이라는 커다란 목표를 달성하셨어요. 이것만으로 대단합니다. 그리고 목표를 이뤄낸 후 강력한 목표가 사라진 일상과 마주치게 되셨습니다. 예전처럼 행위 모드로 살 에너지도 없고 무력하다는 것은 ‘이미 할 수 있는 온갖 노력을 다 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아무런 목표나 욕심, 기대 없이 그저 현재에 온전히 살아있음을 느끼고, 애쓰지 않음을 경험한 게 언제가 마지막이셨을까요? 혹은 아직 경험해본 적이 없으실까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연자님의 일상은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아주 잘하고 있으신 겁니다. 지금도 충분히 괜찮습니다. 진심으로 수용해주세요.앞으로는 지나치게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경험을 편견 없이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존재모드(Being Mode)로 살아보는 연습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마음챙김 명상에 대한 독서나 오디오 실습으로 가볍게 시작해봐도 좋고요. 약물치료와 심리상담을 경험한다면 부정적인 감정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정리해보겠습니다. 앞으로 생각해볼 화두입니다. 과제라고 드리면 무리하게 새로 계획 세우실까봐 그저 가볍게 담아두기를 추천합니다.

존재모드로 산다는 것은?

1. 현재 자신의 경험을 ‘문제로 보는 관점’을 지양하기

2. 긍정적 감정만을 편식하거나 부정적 감정을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바라보기. 

3. 어떤 경험이든 충분히 자신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음을 인정하기

4. 자신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기     

이 네 가지를 당장 적용하기는 쉽진 않지만, 사연자님이라면 충분히 역량이 있다고 믿습니다. 사연자님이 삶의 모든 경험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시기가 가능한 금방 찾아오기를 조금 더 평온해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