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Mail] 언니를 떠나보낸 후 삶이 무너졌어요

2021-06-28     박초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 사당 숲 정신과, 박초연 전문의]

 

사연)

제 인생이 박복하고 순탄치 않으면서도 긍정적으로 잘 지내 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제 생각이 달라진 계기는 저의 친언니의 일이 이유였던 것 같아요.

저는 언니랑 무식하게 싸우면서도 없으면 못살듯 단짝 친구 같았어요. 없으니 정말 못 살겠네요... 아주 끈끈히 친한 자매였어요. 20대에 집에서 제가 장녀 역할을 했다 보니 제 언니지만 제 자식 같은 마음도 있어요. 게다가 친구 같아 누구보다도 그 마음을 잘 알았죠.

 

우리 언니는 그저 잘살아보려고 했을 뿐이죠. 우리 자매에게 하늘도 무심하지. 언니가 암 기수도 안 나오는 0.5cm도 안 되는 암이 생겼는데.. 그때 저는 언니에게 요즘 누가 암으로 죽냐며 소리쳤어요. 언니가 죽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지만 그렇게 얼마 안 돼서 죽을 줄은... 정말 어이가 없죠.

저희 언니는 수술을 받았고 분명 병원에서 정말 괜찮다고 했는데 서너 달 뒤, 3기가 되어있었고 병원에 장기 입원해서 있는 동안, 병원에서 도대체 매일 뭘 한 거였는지 갑자기 마음의 준비를 하라더군요.

그렇게 제 언니는 결국 집에 못 왔습니다. 1년 정도 만에 급속도로 죽어 버렸어요. 장례식장에서 차가운 저희 언니를 만지는데 너무 허무한 거예요. 삶이라는 게... 그저 잘살아보려고 했을 뿐인데.

 

언니 간병을 거의 제가 도맡아 했는데요, 저희 집안일이 가족 사이에도 아주 많은 일이 있었거든요. 그럴 시간에 죽기 전에 화목한 모습 보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저 언니 옆에 더 있어 주지 못한 제가 원망스럽고 살면서 외롭게 뒀던 시간들이 미안하고 죄스러울 뿐이죠.

그렇게 저는 언니가 죽은 후 잠만 잤어요. 한 달 정도 잠만 잔 것 같아요. 근데 그 이후 몸이 많이 아팠어요. 지난날의 관리 못 한 누적도 있겠지만 언니 간호할 때 정말 많이 무리했거든요. 점점 심해지더니 어느 날부터 연하곤란까지 생겨서 일주일 사이 십키로 가까이 빠지고 몸은 움직일 수도 없어서 나도 이제 죽겠구나 하는 경험을 했어요.

 

사진_freepik

 

뭐 어떻게 수개월 간 여차저차 치료하고 살아있네요. 근데 그 당시 제 마음가짐이 바뀌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예전엔, '언제 죽을지 모르니 오늘이 마지막처럼!!' 하며 살았는데 '살려고 발버둥 쳐도 어차피 죽으면 땡인데 뭘 아등바등' 하는 생각으로 바뀐 게 문제일까요? 삶의 원동력을 잃은 것 같아요..

언니가 죽은 후 저도 힘든데 가족 간의 일도 많았고 엄마의 분리불안증이 저를 더 지치게 만들기도 했고 모든 걸 말하기엔 너무 많고 복잡해서 다 할 수는 없지만..

 

지금 햇수로 사 년째 저는 집 밖에 안 나가요. 사람, 친구 안 만난지 오래됐고 집에서도 큰 움직임 없이 있어요. 그리고 씻을 생각도 안 들어요. 청결에 대한 생각도 왜 없어진 건지 모르겠지만 씻는 날은 정말 겨우겨우 어렵게 씻어요. 씻을 기운도 없고 무기력함이 너무 심각한 것 같은데 저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어요. 스스로도 답답해 미칠 것 같아요. 뇌에서 명령을 하는데 몸이 완전히 제 말을 안 듣는 것 같달까요.

이렇게 두면 안 되겠다 생각이 든 건.. 집안 재정상태가 완전히 무너졌거든요. 사라질 수도 없고 더 이상 회피할래야 할 수도 없고.. 당장 나가서 일해도 어려운 판국인데 내 몸을 내 의식대로 움직일 수가 없고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게 우울증인지 무기력증인지 뭔지 고쳐질 수나 있을는지 일단 내가 어떡해야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

너무 어렵고 마음이 안 좋아서 답답해 글이라도 올려봅니다. 명쾌한 답글 부탁드려요.

 

 

답변)

언니를 떠나보낸 후 상상할 수조차 없는 큰 슬픔에 괴로워하고 계실 사연자님의 글을 보니 저도 먹먹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간 힘든 시간을 보내셨으리라 짐작해봅니다.

사랑하는 가까운 이를 잃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엄청난 상실감과 죄책감을 들게 합니다. 그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괴롭고, 더 해주지 못했던 것들이 떠올라 마음을 어지럽히죠. 그런데 이러한 슬픔에 기간이 정해져 있을까요? 실제로 진료실에서도 배우자와 같은 가까운 가족을 잃은 분들을 뵐 때마다 '얼마나 지나야 좀 괜찮아질까요?' 하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과거에는 정상 애도 반응이라고 하여 가까운 사람을 떠나보낸 후 일정 기간까지는 심한 우울감이나 고통이 생길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어느 정도 인지와 관계없이 우울 장애의 진단을 만족할 만큼 증상이 뚜렷하다면 정상 애도 반응이 아니라 우울장애로 진단을 하는 것으로 현재는 기준이 바뀌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 자체가 심각한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해 우울증을 발병하게 하기도 하고, 애도 반응이 1년 이상 넘어가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는 경우가 있어 기간과 관계없이 조기개입이 필요하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사연자님이 이야기하신 것들을 살펴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공허함과 상실, 죄책감이 단순 애도 반응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만연한 불행감과 지속되는 무기력감,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의 기능 저하를 보이고 있는 것 같아 우울장애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우려됩니다.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해 진단과 치료를 받아보시길 적극적으로 권해드립니다.

 

사진_freepik

 

사연자님의 '박복하고 순탄치 않은 인생'에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마도 언니의 사망 이전에도 사연자님에게 여러 가지 힘든 부분들이 있었고, 그럼에도 나름 그런대로 버티며 살아왔으나, 언니가 떠난 것이 명백한 유발요인이 되어 그동안 애써 유지하던 상태가 무너지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마치 큰 항아리에 물이 점점 채워지고 있다가 마지막 한 방울이 흘러넘치고 나서야 비로소 가득 찼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또한 그런 '박복하고 순탄치 않은 인생'임에도 긍정적으로 잘 지내왔다는 이야기가 사연자님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이나 이로 인한 상처도 겪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무난히 넘기고 헤쳐나가는 데에는 각자가 가진 다양한 자원들을 동원하게 되는데요, 이것은 주변의 나를 지지해주는 주변 사람들이나, 현실적 환경 같은 외적인 것일 수도 있고, 나의 성격특성이나 대처방식과 같은 내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마 친언니는 사연자님의 외적 자원 중 큰 부분을 차지하였겠지만 그 외에도 사연자님 안에 내재되어 있는 내적 자원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스스로가 지금까지 버텨온 자원이 무엇이었을지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사연자님을 다시 극복할 수 있게 해줄 거예요.

 

다시 집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돌보는 것을 먼저 해야 합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씻는 아주 기본적인 것들부터요. 나를 잘 돌봐야만 집안을 잘 돌볼 수 있고, 그래야 집 밖의 일들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사연자님은 씻는 것조차 힘들어졌다고 이야기하신 걸로 보아 스스로를 돌보는 것조차 힘든 상태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에 더욱이 전문의와의 상담과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주저 마시고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해주세요. 제 답변이 도움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