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Mail] 특별한 이유 없이 너무나 괴로워요
[정신의학신문 : 한명훈 광화문 숲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저요 힘들진 않거든요? 솔직히 힘들면 안 돼요. 전 좋은 환경에서 사랑도 엄청 많이 받고 자랐거든요. 살면서 좌절도 해본 적 없어요. 진짜 행복해야 해요. 근데 그냥 너무 모르겠어요. 행복해야 하는데 전 왜 행복하지 않을까요?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면 주변에 사람들이 절 보면서 저렇게 운이 좋으면서.. 하면서 욕할 것 같아요.
오래되진 않았는데 자해를 하기 시작했어요. 왜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이 정도도 하지 않으면 내가 불행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쓰레기 같아요. 진짜 제가 너무 싫어요. 처음엔 그냥 가볍게 그었는데 이젠 피도 좀 나요. 근데 요즘에 가장 성취감이 드는 일이 팔을 긋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짜 우울하진 않아요. 우울하거나 슬프거나 막 화가 난다거나 그러지도 않고요. 그럼 대체 자해는 왜 하는 걸까요? 엄마한텐 절대 못 말해요. 죽어도 말 못 해요. 저 좀 도와주세요. 아무한테도 얘기를 못 하겠어요.
답변)
외적으로 보이는 환경과 각자의 마음에서 겪는 괴로움은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부럽거나 좋은 환경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서 겪는 세세한 내용까지 전부 알 수는 없죠. 심지어 자신조차도 마음이 곪아가고 괴로운 것을 깨닫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마음의 상처는 깊어져 갈 수 있습니다.
질문자님께서는 내 힘든 마음이 왜인지도 모르게 괴로워지고 자해를 하게 되는 부분이 있으시군요. 나는 행복해야 하고 힘들면 안 된다는 강한 마음이 마음의 상처를 떠오르고 깨닫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답니다. 써주신 말씀만으로 질문자님의 마음을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무척 당황스럽고 속상한 마음일 것이라 짐작해봅니다.
질문자님은 자해를 통해 이런 감정적인 요동이 해소되는 경험을 하셨고, 또한 눈으로 드러나는 괴로움의 상징으로도 표현되는 것 같습니다. 괴로워하면 안 되고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질문자님 마음 안에 있는 괴로움을 느끼고 알게 하기보다는 무의식 저편에 미뤄두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편으로 사라진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고 모습을 숨기고 의식으로 떠오르기만을 기다리는 상태가 된답니다. 이런 괴로움은 최종적으로 뚜렷한 감정이나 느낌으로 경험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막연한 불편감이나 혹은 전혀 느껴지는 불편감이 없더라도 자해를 하게 되는 충동이나 행동을 통해 나타나기도 합니다.
사람이 우울해지면 우울함을 느끼기도 전에 가장 먼저 식욕이 떨어지고 잠을 못 자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울한 감정이나 생각을 알아채기도 전에 다른 방식으로 드러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런 마음의 괴로움을 다루는 방법으로 자해를 하게 되고, 자해 이외에는 괴로움을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해는 신체에 흉터와 괴로움을 남기고 점점 더 심한 정도로 이어질 수 있기에 마음속 괴로움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질문자님의 경우 자신도 알기 어려운 마음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일반인이나 혼자의 힘으로는 다루기 어려운 경우가 많을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심리상담 센터나 정신건강의학과를 내원하시어 치료자와 함께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셨으면 합니다.
치료자를 찾기 전 주저하는 마음이 들어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치료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전 자해 충동이 들 때 위급하게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을 몇 가지 소개해드려 볼까 합니다.
1. 환경 조정하기
1) 자해를 하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는 지점을 포착한다.
(생각, 감정, 느낌, 알 수 없는 충동)
- 이를 포착하려고 연습하는 부분이 가장 어렵기도 합니다.
- 스스로의 마음을 점검하고 찾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2) 주변 환경을 변화시키거나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
2. 환경을 변화시키는 방법이 효과가 없다면 충동을 완화시키기 위한 이완요법을 시도해본다.
1) 호흡을 가슴이 아닌 배로 한다고 생각하고 숨을 들이쉰다.
- 너무 깊은숨을 쉬지 말고 편안한 정도로 한다.
2) 숨을 들이마시면서 마음속으로 천천히 셋을 세고,
잠시 멈추고 둘을 세고,
숨을 내쉬면서 천천히 다섯을 센다.
(숫자를 정확히 세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천천히 한다는 것에 집중합니다.)
3) 호흡을 하면서 신체의 부위를 마음의 눈으로 보면서 위축된 부분을 이완시킨다.
4) 모든 부위가 이완되었다면 다시 호흡에 집중하고 이를 5~10분간 반복한다.
*위 상황을 따라 하기 어렵다면 유튜브에서 명상과 호흡법을 검색하시고 이어폰으로 들으면서 하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3. 안전지대를 상상해 본다.
1) 각자가 생각하기에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환경이나 조용한 장소를 마음속으로 떠올린다.
2) 환경과 장소의 풍경, 모습(시각), 냄새(후각), 소리(청각), 피부로 느껴지는 감각(촉각)을 상상한다.
- 풍경은 어떤지?
- 눈을 감고 느껴지는 주변 환경의 냄새는?
- 그 장소에서 들리는 소리는?
- 피부로 느껴지는 온도나 바람의 느낌은?
3) 그곳에 내가 있다고 상상하면서 위의 이완요법과 호흡을 반복한다.
위의 충동이 드는 상황에서 마음을 안정을 찾기 위한 방법들이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질문자님의 상황과 마음을 함께 듣고 고민해보아야 어떤 마음일지 조금이나마 나누어드리고 싶지만, 허용된 상황 내에서 이 게시판의 이 짧은 글이 자그마한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가능하다면 빠른 시일 내에 마음의 괴로움에 대해 치료자와 나누어보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