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Mail] 폭력에 대한 기억으로 힘들어요
정신의학신문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저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했습니다. 아버지는 언니와 저에게 화풀이하며 오로지 본인의 기분에 따라 폭력을 저질렀습니다. 현재 저는 25살입니다. 문제는 최근 들어 그때의 기억이 유리 파편처럼 머릿속에 쏟아진다는 것입니다. 이제껏 괜찮게 살아왔고 다 잊은 줄만 알았는데 갑작스럽게 떠올라 현재의 저를 괴롭게 합니다. 왜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이 튀어나왔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문득 찾아오는 기억 때문에 숨이 턱턱 막히고, 눈물이 날 때가 늘었습니다. 정도가 심해져 1시간 내내 울면서 자살할 궁리만 한 적도 있습니다.
제일 걱정되는 점은 이런 제가 언젠가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남성을 기피해왔습니다. 아직도 남성과 이야기하는 것이 어렵고 형식적인 대화만 합니다. 갑자기 욱하거나 화낼까 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아닌 걸 알면서도 잘 되지 않아요.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 잘 읽어보았습니다. 다 잊었다고 생각한 일이었는데, 갑자기 떠올라 일상에 침투하니 아주 괴롭고 힘드셨을 것 같아요.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어떤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진한 상처가 되기도 하니까요.
사건 당시로부터 시간이 흐르면 그 사건을 다른 방향으로 볼 수 있고, 기억이 옅어질 수도 있긴 합니다. 그러면서 좋아지는 경우도 있어요. 사연자님은 잊고 살았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잊었다고 믿은 것뿐 마음속에 그대로 남은 것이 문제로 보입니다. 대처가 잘 안 되었기 때문에 특정 상황에서 떠오르는 것이죠.
학대의 기억을 모조리 트라우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트라우마’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강력한 충격으로 발생하며, 그로 인한 반복적인 재경험을 말합니다. 사연자님의 경우, 회피하거나 도망갈 수 없는 경험이었기에 깊은 상처로 남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당시와 비슷한 상황에서 불안을 느끼고 감정적 동요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이러한 증상은 트라우마의 일종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교통사고를 크게 겪었던 사람이 경적에 놀라거나, 신체적인 고통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것과 같이요.
또한 ‘아버지’가 폭력의 원인이라는 점이 더욱 힘들 수 있습니다. 폭력을 당한 사실 자체도 물론 중요하지만, 성장 과정에서 사회적, 경제적, 정서적으로 지지대가 되어줘야 하는 보호자의 지지를 충분히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니까요.
혼자 힘으로 눌러왔던 학대의 경험이 현재에 갑작스럽게 나타났다면 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를 상기시키는 비슷한 상황이 찾아왔거나, 상황은 다르지만 그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수 있습니다.
억압되었던 과거를 들추어낸 기제(機制)를 찾아 극복하는 것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연자님이 일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 있으면 현재와 미래, 자기 자신까지 제대로 마주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감정적, 신체적 동요를 가라앉힌 후에 자신이 잊으려고 노력했으나, 더 커져 버린 아픔을 마주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어떨 때 괴로운 증상이 심해지는지, 증상의 정확한 병명은 무엇인지 알고 회복하려고 시도해야겠지요. 과거의 상처가 미래에 관한 두려움으로 이어지며 야금야금 일상을 잡아먹지 않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많은 분들이 발생한 문제에 관해 자책하거나, 원인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곤 합니다. 본인이 잘못하거나 못난 것이 아닌데요. 사연자님 또한 어떤 경우더라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과거의 기억은 그때의 자신을 후회하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했더라면 좋았을 텐데’와 같은 생각이 들기 쉽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걸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요. 학대받은 사건이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그 상황을 본인의 이유 혹은 원인으로 끌고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미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현재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찾아오는 감정들이 괴롭고 고통스럽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홀로 감당하지 마시고 편하게 내원하시는 것도 방법의 하나입니다.
서대문봄 정신과 이호선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