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거미만 지면 잠이 오지 않을까 봐 걱정돼요 - 수면제 중독
전형진의 [중독 인생을 위한 마음 처방전] (17)
[정신의학신문 : 신림 평온 정신과, 전형진 전문의]
잠을 자고 싶은데, 잠이 오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증상이 불면증(不眠症, Primary Insomnia)이다. 자는 도중에 자주 깨서 숙면을 방해하고, 너무 일찍 잠에서 깨어나는 증상도 이에 포함된다. 적어도 1개월 이상 잠들기 힘들고, 잠을 유지하기 어려우며, 그로 인한 피로감 때문에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때 진단하는 질병이다. 건강한 수면이 이루어지지 않아 정상적인 활동이 곤란한 상태, 즉 잠 때문에 발생하는 모든 수면장애(Sleep Disturbance)의 일종이다. 밤에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할 경우, 수면 부족으로 인해 한창 일해야 할 낮 동안에도 몸이 나른하고 졸음이 찾아오며 의욕이 생기지 않는 등 삶의 질을 크게 떨어뜨린다.
최근 불면증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부쩍 늘어났다. 20~30대 중에도 밤에 잠을 못 자 고생하는 사람들이 증가하는 추세다. 불면증은 건강한 사람도 한 번쯤 겪어봤을 만큼 흔한 질병이기는 하지만, 요즘 특히 눈에 띄게 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코로나 사태 장기화로 우울과 불안 증세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진 데다 경기 침체가 이어지면서 경제적 문제로 인한 압박과 스트레스가 급격히 증가한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인구의 노령화, 1인 가구의 확대에 따른 정서적 결핍, 각성제 혹은 스테로이드 같은 각종 물질 남용에 의한 수면 방해, 교통의 발달에 따른 수면주기의 변화 등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치료를 받는 환자의 80% 정도가 이런저런 수면장애를 호소한다. 우울증 환자의 경우 쉽게 단잠을 자기가 어렵다. 수없이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다 해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금방 깨는 경우가 많다. 조증이나 불안장애, 강박 신경증이 있을 때도 불면증으로 괴로워한다. 이럴 때 가장 쉬운 방법이 수면제에 의지해 잠을 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걱정이 앞선다. 수면제를 먹으면 과연 잠이 잘 올까? 낮에 일상생활을 이어가는 데 지장은 없을까? 수면제에 자꾸 의존하다 보면 혹시 중독되지는 않을까? 잠 때문에 고통스러워 수면제의 힘을 빌려서라도 충분히 자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염려스러운 것도 많다.
수면제(Hypnotic)는 대부분 중추신경계(Central Nervous System, 여러 감각기관에서 받아들인 신경 정보들을 모아 통합하고 조정하는 우리 몸의 중앙처리장치로 뇌와 척수가 이에 해당한다)를 억제함으로써 잠들게 하거나 수면을 유지하도록 만든다. 수면제는 의사의 처방이 없으면 구할 수 없는 전문의약품과 약국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일반의약품으로 나뉜다. 전문의약품인 수면제는 향정신성의약품(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것으로 오용이나 남용 시 인체에 현저한 위해가 있다고 인정되는 약물)에 속한 약물과 속하지 않은 약물로 다시 분류된다. 향정신성의약품에 속하는 수면제는 벤조디아제핀계 약물이 있고, 향정신성의약품에 속하지 않는 수면제는 독세핀, 멜라토닌이 있다.
수면제 중독(Hypnotic Poisoning)이란 수면제를 지나치게 사용해서 중독 상태에 이른 것을 가리킨다. 급성 중독은 고의나 실수로 수면제를 과량 복용하여 독성 부작용이 발생한 경우다. 오용이나 특이체질로 인해 일어나는 수도 있지만, 대부분 자살을 목적으로 대량 복용해 발생한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 중 수면제를 대량 확보해 이를 복용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최근에 사용되는 수면제는 과다 복용해도 사망 위험성이 높지 않다. 과거 바르비탈류 수면제를 사용할 때 통용되던 상식이 아직도 이어져 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만성 중독은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무조건 수면제를 복용함으로써 중독 상태에 이른 것이다. 기간이 짧고 사용한 약제가 소량일 경우에는 즉시 복용을 중단하면 되지만, 기간이 길고 대량일 경우에는 입원해서 점진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잠이 오지 않거나 잠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이나 질병은 수면제 복용과는 별도로 치료해야 한다. 수면제는 일시적인 효과를 주는 약물이기 때문에 이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든가 수면제를 장기간 복용하다 보면 불면증이 저절로 나으리라 기대하는 건 금물이다. 자칫하면 의존성이 심화하면서 중독, 내성, 금단증상을 일으킬 수 있으며, 심하면 합병증이 발생할 수도 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극 중 등장인물이 잠이 오지 않을 때 머리맡에 있는 탁자 서랍을 열어 수면제 약통에서 약을 몇 알 꺼내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신 후 이불을 뒤집어쓴 채 곧바로 잠에 빠져드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수면제만 먹으면 언제든 잠을 잘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잘 오지 않거나 상당 시간이 흘러야 잠이 오기도 한다. 개인의 성격이나 체질에 따라 다양한 효과가 나타난다. 오랫동안 수면제를 복용하는 환자의 경우, 수면제를 먹었는데도 잠은 오지 않고 몸은 더 피곤하며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해지기도 한다. 불면증의 원인은 그대로 두고 수면제만 복용했기 때문이다.
필요할 때 전문가의 지도하에 최소한의 기간으로 약물을 복용하는 것은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무턱대고 수면제를 먹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불면증의 원인을 찾아 이를 없애거나 감소시켜야 한다. 성격이 조급하거나 잠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경우 또는 지나치게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에게서 불면증이 자주 나타난다. 극심한 피로, 어수선한 주변 환경, 잦은 스트레스, 불편한 대인관계, 비정기적 교대 근무, 강한 업무 강도 등이 누적되면 불면증이 생길 수도 있다. 이런 원인을 발견해 개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불면증 환자들과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씩 드러난다. 본인도 몰랐거나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 버린 일이 불면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오랫동안 만난 애인과 더 진척이 없어요. 헤어질지 계속 만날지 고민이에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성취감이 느껴지지 않아요. 왜 죽어라 일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내와의 관계가 갈수록 답답해지는 것 같아요. 점점 더 데면데면해지네요.”
중요한 것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데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