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방향이 아닌 일방향 관계가 더 익숙한 나 – 관계의 방향 바꿔보기
조장원의 ‘직장 남녀를 위한 오피스 119’ (34)
[정신의학신문 : 민트 정신과, 조장원 전문의]
고수직 대리는 요즘 골치가 아프다. 얼마 전에 입사한 문수평 사원 때문이다. 정말 오랜만에 신입사원이 들어와 뛸 듯이 기뻤는데, 잠시뿐이었다. 일을 덜기는커녕 외려 스트레스까지 덤으로 안게 됐다. 영 배우려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되지 않는다.
“월별 분기별 통계 작성법에 대해 알려줄 테니까 시간 좀 내요. 언제가 좋아요?”
“아, 제가 과장님 지시로 작성해야 할 문서가 있어서요. 이번 주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뭘 좀 가르쳐주려고 시간 있냐고 물어보면 늘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거나 무시하기 일쑤다. 자기가 직속 상사인 고 대리에게 사정해서 일을 배워야 할 처지인데도 도리어 고 대리가 쫓아다니면서 사정해가며 일을 가르쳐야 할 형편이다. 위계질서는 물론 기본예절도 형편없다고 느껴진다.
지난주 부서 전체 회의 때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고 대리는 지금도 부아가 치민다.
“그건 그렇고, 요즘 뭐 불편한 거 없나? 문수평 씨는 좀 어때? 힘든 거 있나?”
“아, 예……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업무량이 신입사원 치고는 좀 많은 것 같고, 점심시간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것 같아서 불편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심부름을 시키는 선배님들도 있고…….”
회의 끝 무렵에 부장이 애로사항이 없는지 지나가는 말처럼 물은 걸 가지고 이때가 기회라는 듯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불편한 점들을 미주알고주알 풀어놓는 게 아닌가. 문수평 사원의 이런 태도에 부서원 전체가 놀라는 분위기였다. 고 대리는 놀란 정도가 아니라 분노가 끓어올랐다.
‘아니, 내가 신입사원일 때는 저러지 않았는데…… 직속 상사인 나를 어떻게 보고 감히…….’
고 대리는 출근길에 오늘은 문수평 사원을 어떻게 다뤄서 콧대를 꺾어놓을까를 궁리하고, 퇴근길에 내일은 어떻게 하면 문수평 사원을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순한 양으로 만들까를 고민한다.
고 대리처럼 수직적인 관계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수평적인 관계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물론 자기 때와 판이하게 행동하는 신입사원을 보면 다소 억울한 기분도 들겠지만, 그보다 자신이 알고 있던 기존의 대인관계 방식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을 보며 일종의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라떼는 말이야.”
최근 유행하는 신조어다. 예전에 있었던 일이나 왕년에 경험한 일을 무용담처럼 늘어놓으며 후배나 부하를 은근히 폄훼할 때 쓰는 말투를 일컫는다. 꼰대들이 자주 사용하는 대화 방식이다.
하지만 이런 말투와 사고방식이 중년층 이상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젊은 세대에서도 이런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근래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 상담하는 젊은 직장인 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꼰대처럼 대놓고 “라떼는 말이야.”라고 하지는 못하지만, 속으로는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후배들과 관계가 틀어져 혼자서 끙끙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대인관계에서 왜 이와 같은 태도와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
사실 고수직 대리가 자주 쓰는 ‘감히’라는 표현은 어린 시절 그가 아버지에게 수시로 듣던 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무조건 복종을 요구하던 권위적인 아버지였다. 부모와 자식 관계를 서로 존중하는 수평적 관계로 보지 않고, 지시하고 복종하는 수직적 관계로만 파악한 것이다.
“이 녀석이 감히 누구 앞이라고!”
“아버지 앞에서 어디 감히 그런 말버릇을…….”
고수직 대리는 이런 아버지 영향을 받았다.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반듯하게 적용되는 문화가 자연스럽고 편했다. 상사들에게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으로 대하면 다들 좋아했다. 예의 바르다며 칭찬도 많이 받았다. 그가 지금껏 경험한 대부분의 관계는 수직적인 관계였다. 간혹 수평적인 관계에 속하게 될 때는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이런 사람들은 관계에 있어서 매우 경직되어 있다. 대인관계 패턴이 변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지시한 일만 하면 되고 책임은 비교적 가벼운 신입사원 시절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다. 경력이 쌓여 진급해서 선배나 상사가 되면 신경 써야 할 일이 많고 중요한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 하며 책임질 일도 늘어나기에 불행하다. 어려서부터 경험한 수직 관계에 고착되어 있다.
수직적인 관계가 위험한 이유는 이런 관계에서는 아래에 있는 사람이 위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통제당하기 때문이다. 억압과 통제에 놓인 사람은 분노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이런 관계를 당연시하면서 분노를 억압하기도 하고, 다른 대상에게 화풀이하거나 신체적 증상을 나타내기도 하며, 폭음 등 일탈행위로 이어지기도 한다. 수직적인 관계는 누군가 희생하는 관계다. 누구도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싶지 않다. 희생을 강요하거나 요구하는 관계는 건강한 관계가 아니다.
고수직 대리 같은 이들에게는 위아래 관계가 확실해야 일이 제대로 진행이 된다는 강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 회사든 가정이든 어떤 조직이든 그래야 돌아간다고 믿는다. 그러나 역할 구분이 명확해야 일이 잘 진행되는 것이지 위아래 관계만 분명하다고 해서 일이 진행되는 건 아니다. 수직적인 관계는 일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관계가 아니기에 일대 변화가 요구된다.
먼저 관계의 목적을 명확히 해야 한다. 회사는 일을 위해 맺어진 관계다. 일을 위한 것이라면 수용할 수 있어야 하고, 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른 관계다. 수직적인 관계를 원하는 사람들이 수평적인 관계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일을 위한 것이라고 강요하는데, 과연 그것이 일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개인을 위한 것인지는 고민해봐야 한다.
관계에 있어서 누군가를 만족시켜주기 위한 관계는 건강하지 않은 관계다. 내가 타인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뭔가를 해서도 안 되고, 타인이 나를 만족시켜주도록 뭔가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
두 가지 관계의 방향을 동시에 바꿔보자. 한 가지만 바꾸면 안 된다. 한 가지만 바꾸는 것도 결국은 일방향적인 변화일 뿐이다. 양방향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양쪽이 다 바뀌어야 바뀐 것이다.
일단 가벼운 것부터 시작한다. 내가 복종하거나 타인의 복종을 바라던 습관을 고쳐서 하나씩 쉬운 것부터 바꿔나가는 것이다.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보고 음식 메뉴를 결정한다거나, 부하 직원이 내 문자 메시지를 보고 짧게 답장했다고 해서 기분 나빠한다거나 하는 습관부터 고쳐야 한다.
수평적인 관계에 익숙한 사람들을 보고 따라 하는 것도 좋다. 이들로부터 얼마든지 배울 게 많다. 나이나 직급을 떠나 수평적인 관계만큼은 그들이 나보다 얼마든지 선배이자 스승일 수 있다.
동시에 사랑스러운 내 아들딸이 회사에서 이런 경험을 한다면 어떨지를 상상해본다. 매일 선배나 상사에게 “라떼는 말이야.” 소리를 듣고 복종을 강요당하며 통제 속에 살아간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건 자연이나 환경뿐 아니라 관계와 문화도 포함된다.
이와 같은 변화가 관계를 가볍고 멀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균형적으로 만들어서 더 안정적이고 오래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공적인 관계는 수직적인 관계여야 하고 사적인 관계만이 수평적인 관계라는 고정관념은 오류다. 수직적인 관계는 한쪽에서는 존중하기만 하고 한쪽에서는 존중받기만 하는 관계다. 어떤 관계든지 상호존중이 가능할 때 안정적으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동시에 누구에게나 당당한 내가 되어보자.
※ 본 기사에 등장하는 사례는 이해를 돕기 위해 가공된 것으로 실제 사례가 아닙니다.
※ 본 연재는 이번 기사로 종료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연재 원고는 조만간 『나를 지키는 심리학』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