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상사의 감정 쓰레기통인가요? - 감정 통제와 조절의 기술
조장원의 ‘직장 남녀를 위한 오피스 119’ (28)
[정신의학신문 : 민트 정신과, 조장원 전문의]
김꽃잎 씨는 사회 초년생이다. 회사에서는 신입사원, 팀 내에서는 막내로 불린다. 한창 혈기 왕성하게 일하면서 분위기를 생동감 있게 만들어야 할 재기 발랄한 새내기다. 회사는 물론 일도 마음에 들고 월급이나 사원 복지도 동종 업계 최고 수준이라서 모든 면에서 만족하게 일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김꽃잎 씨는 출근하는 게 두려워졌다. 입사 2년 차인 박 대리 때문이다.
“꽃잎아 바빠?”
늘 이렇게 시작한다. 박 대리가 그녀 자리로 다가와 바쁘냐고 말을 붙이면 실제로 바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일에서 손 떼고 자신과 수다 떨러 나가자는 이야기다. 여직원 휴게실이나 로비에 있는 커피숍이 주로 수다 장소로 이용되는 곳이고, 좀 길어질 때는 회사 밖 카페에 가기도 한다.
“말도 마. 요즘 내가 죽을 맛이라고. 왜 그런 줄 알아? 그게 다 허 과장 때문이지 뭐야.”
넋두리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엄청난 일이 있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듣다 보면 사실상 별일이 아니다. 결국 자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자신을 괴롭힌다는 상사 뒷담화에서부터 묻지도 않은 자기 가정사까지 사설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지치지도 않는 에너지가 감탄스럽다.
입사 초기에는 박 대리가 김꽃잎 씨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게다가 별것도 아닌 일로 공개적으로 그녀를 비난하고 저격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김꽃잎 씨는 박 대리 때문에 회사생활이 순탄치 않으리라 생각했고, 박 대리 앞에서는 매사 긴장하며 조심해야 했다. 그러다 우연히 사내 식당에서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다른 사원 험담에 죽이 맞아 마음을 열게 되었다. 같은 스타일이라는 걸 확인한 박 대리는 이후 그녀에게 굉장히 잘해줬다.
‘그래. 박 대리가 나를 싫어하지 않게 된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야.’
그녀는 이렇게 마음먹었다. 원한다면 언제든 같이 수다는 떨어주겠지만, 그 이상 친해지기는 싫었다. 불가근불가원이라고나 할까. 박 대리가 적이 되게 않게끔 잘 관리하면서 지내려고 했다.
하지만 박 대리는 해도 해도 너무 했다. 김꽃잎 씨는 바쁘지 않을 때 휴게실이나 커피숍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좀 쉬고 싶었고, 점심 식사 후에는 회사 옆 공원에서 산책도 하고 싶었다. 박 대리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자기 급한 일을 끝내면 쪼르르 내 자리로 다가와 속삭였다.
“꽃잎아 바빠?”
그녀는 모든 부서원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큰소리로 외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 나 바쁘다. 좀 꺼져 줄래?”
그러나 목소리는 입 안에서만 맴돌 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네, 괜찮아요. 어디로 갈까요?”
“할 이야기가 많아. 요 앞에 근사한 카페가 새로 생겼던데 그리로 가자.”
카페가 어떻게 생겼든, 커피 맛이 어떻든 상관없이 박 대리의 수다는 속사포처럼 이어졌다.
‘아, 귀 아파. 도대체 이 넋두리를 언제까지 들어줘야 하는 거야. 정말 미칠 것 같아.’
박 대리는 쉴 새 없이 떠들었고, 김꽃잎 씨는 그녀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느라 양쪽 귀를 완전히 개방해 놓아야만 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박 대리를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기도가 이루어질지 아니면 자기가 다른 부서로 옮겨 가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박 대리는 김꽃잎 씨를 자신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사용하고 있다. 감정 쓰레기통이란 타인을 자신의 감정을 배설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다. 시도 때도 없이 며느리에게 전화해서 자신의 날 선 감정을 여과 없이 털어놓는 시어머니가 있다. 며느리로서는 전화를 안 받을 수도 없고, 듣기 싫다고 도중에 끊을 수도 없다. 이럴 때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이런 사실을 남편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다. 십중팔구 남편은 아내를 인내심 없는 여자, 불효 막심한 며느리로 몰아붙일 게 뻔하다. 친구 중에도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전화를 걸어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 사람이 있다. 자기 남편한테도 할 수 없는 말을 밤중에 친구에게 해대는 심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상대방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여기는 것이다.
쓰레기통이 된 입장에서는 상대방이 격하게 쏟아버리는 감정을 거부하거나 되돌려줄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랬다가는 두 사람 관계에 금이 갈 것이기 때문이다.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도리가 없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매번 쓰레기통 신세가 되어야 하는 스스로가 밉기도 하다.
보통 감정 쓰레기통이 되는 대상은 상대방이 죽도록 미우면서도 오히려 그가 나를 미워할까 봐 불안해한다. 둘 사이의 관계에 있어 상대방이 우월한 위치에 있는 까닭이다. 직장 상사나 손윗사람 혹은 집안 어른에게 대놓고 싫은 기색을 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상대방이 자신을 미워할까 봐 불안해하는 자신을 원망할 필요는 없다. 상대방도 그걸 아니까 나에게 감정을 배설하는 것이다.
한 번쯤 상대방의 분노를 제대로 받아본 경험이 있는 경우에 감정 쓰레기통이 되기 쉽다. 당시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잘 알기에 다시 그 같은 상황이 올까 봐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누군가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는 걸 확실하게 거부할 수 있다면 제일 좋지만, 그게 여의치 않기에 고민이 된다. 정 거절할 수 없다면 적어도 내게 오는 감정적 손실을 최소화해야 한다.
첫 번째 해결책은 세팅하기다. 방해받지 않을 만한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환자 중에서 간혹 내게 이렇게 질문하는 분들이 있다.
“선생님은 매일 수많은 환자의 고민을 들어야 하는데, 힘들지 않으세요?”
겉으로 보기에는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환자들과의 면담 시간과 장소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기에 그 시간 동안 환자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나면 또 다른 일에 얼마든지 집중할 수가 있다. 시간과 장소가 분명히 정해져 있으면 상대방의 감정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여력이 생긴다.
“대리님, 30분 뒤에 여직원 휴게실에서 이야기 나눠도 괜찮을까요?”
박 대리의 요청이 있을 때 김꽃잎 씨가 기다렸다는 듯 즉각 응하지 말고, 이렇게 특정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응하는 게 좋다. 수다는 박 대리가 떨더라도 그 기회는 김꽃잎 씨가 주는 것이다.
대부분 감정 다루기가 그렇듯이 통제하고 조절하는 일이 가능해야 한다. 상대방이 원할 때 무조건 들어주는 게 아니라 원하더라도 내가 가능한 시간과 장소에 맞춰 들어주는 것이다. 이는 거절이 아니다.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쩔 수 없다. 대인관계는 일방 관계가 아니라 쌍방관계다. 그 정도는 상대방으로서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두 번째 해결책은 거짓으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기다. 상대방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나를 위한 것이다.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지 않기 위함이다. 그러면서 대화에 집중하면 듣는 게 편해질 수도 있다. 대화에 집중하는 방법은 장면을 구체적으로 물어보고 눈에서 그림이 그려지듯이 하는 게 좋다. 이렇게 하면 당시 느꼈던 상대방의 감정이 이해된다. 이게 바로 공감이다. 공감은 나라도 그랬겠다가 아닌 상대방의 상황에서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상대방이 듣고 싶은 반응을 궁금해하는 것보다 상대방이 당시에 느꼈던 감정을 궁금해하는 게 더 많은 도움이 된다.
물론 상대방이 공감해주고 싶지 않은 대상일 수도 있다. 한 번 공감해주면 계속해서 자신을 상대로 이야기를 이어갈까 봐 염려돼서일 수도 있지만, 그냥 상대방이 싫은 것일 수도 있다. 만약 후자라면 고민해 봐야 할 게 있다. 그 사람이 나한테 계속 감정을 배설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다른 원인 때문에 싫어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상대방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었다고 느끼는 것이 실은 상대방이 의도한 게 아니라 내가 혼자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위 사연에서는 입사 초기에 박 대리가 김꽃잎 씨를 그렇게 미워하지만 않았더라면, 이후 그녀의 긴긴 수다를 들으면서 자신이 감정 쓰레기통이라는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감정을 배설한 뒤 그대로 끝나버리지 않도록 마무리하는 기술도 필요하다.
“정말 화가 많이 나셨겠어요?”
“기분 진짜 안 좋으셨겠네요. 그렇죠?”
이런 식으로 상대방이 실컷 내뱉은 감정의 찌꺼기들을 다시 상대방에게 고스란히 돌려주고 이야기를 끝맺는 것이다. 심리적 되치기 한판이다. 이 감정은 본래 내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것이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감정의 쓰레기는 내게로 오는 듯했다가 다시 그에게로 되돌아갈 것이다.
※ 본 기사에 등장하는 사례는 이해를 돕기 위해 가공된 것으로 실제 사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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