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Mail] 과거의 상처를 씻어낼 수 있을까요?
[정신의학신문 : 사당 숲 정신과, 박초연 전문의]
사연)
저는 거의 12년째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친구관계로 인해 감정표현도 잘 안 하고 산지 오래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이사 와서 처음 만난 친구가 같이 놀아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초등학교 내내 저는 늘 혼자 다녔습니다. 다른 애들이 뒷담화를 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급식을 먹으러 갈 때 새치기는 기본이었고 거절을 못 하게 웃는 얼굴로 협박하며 급식을 뺏어 먹는 것도 일상이었습니다.
6학년 때까지 저는 늘 혼자였습니다. 부모님께 말해보려고 했지만, 집안 상황이 좋은 편이 아니었고 어릴 때부터 엄마와 아빠의 사이가 좋지 않았고 싸우시는 걸 자주 보고 살았기 때문에 무서움도 있었습니다. 걱정 끼치기 싫어 숨기고 살았습니다. 얼굴에 침을 뱉은 남자애도 있었고 지나갈 때마다 욕을 하는 여자애도 있었습니다.
우울증이 뭔지도 잘 모르던 그때의 제가 우울증이었단 걸 고등학교 때 깨달았습니다. 중학교 때도 따돌림은 일상이었고 유일하게 잘 지냈다고 생각한 친구들도 뒤에선 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여자애는 다른 학교의 자기 친구를 단톡방에 모아놓고 저를 초대해 집단으로 욕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선생님께 도움을 청해도 카톡 내용을 보여줘도 그냥 봐주고 넘어가자고 하시며 제 얘길 들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늘 웃고 다녔습니다.
매일 밤 우는 소리가 들릴까 봐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울었고 칼을 꺼내 들고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갔습니다. 초등학교 3~4학년 때 자학행위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만난 친구들 덕에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두렵고 소리 내서 울지도 못합니다. 수업시간에 발표를 해야 하는데 손이 덜덜 떨리고 눈물이 나서 포기한 적도 많습니다.
우울하고 괴로운데 전 항상 웃고 다닙니다. 꿈속에선 제가 절 찔러 죽이기도 하고 목을 매달기도 합니다. 부모님께도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늘 말 못 하고 있다가 고3 때 정말 못 버틸 것 같아 울면서 소리쳤습니다. 죽고 싶다고 살려달라고 제발 나 정신병원 가둬달라고 내내 소리쳤는데 돌아오는 건 저만 힘든 게 아니라는 얘기였고 버릇없이 소리 지르냐는 윽박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제 가족에 대한 애정도 기대도 없어졌고 소중하지도 않은 마치 남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가족들은 제 트라우마가 왜 심한지 공감하지 못합니다. 대충 잊어버리고 열심히 살라고 하시는데 사람 많은 곳도 싫어하고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지만, 방에서 무기력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만나자는 친구들의 연락도 다 거절하고 빛 하나 없는 방에서 우울해하고만 있습니다.
제가 이상한 걸까요? 다른 사람들이나 친구들은 잘 지내고 일도 하고 있는데 오래전 일로 아직도 괴로워하는 제가 미련하고 게으른 사람인가요? 저는 제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오면 죽을 거라고 다짐했어요. 다들 제가 비정상이라는데 정말 비정상인가요?
답변)
안녕하세요 사당 숲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박초연입니다.
사연 주신 분의 12년의 힘든 시간을 간략하게나마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간 많은 어려움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지속적으로 우울한 기분, 무기력감뿐 아니라 사람들 만나는 것도 피하게 되는 상황이시군요. 사연주신 분의 어려움과 관련하여 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complex Post trauma stress disorder)라는 것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정신의학에서 처음 트라우마를 다루기 시작한 것은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에게서 정신적 후유증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고부터였습니다. 당시 군인들은 전쟁 장면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고 지나치게 과각성되어 예민해지고 깜짝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트라우마 상황과 유사한 모든 것은 회피하게 되고, 본인이나 주변,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인지를 갖게 되었지요. 이러한 증상은 심각한 자연재해나 교통사고, 또는 범죄 등 죽음에 가깝거나 죽음을 위협받는 사건을 겪은 사람들에게서 비슷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트라우마의 강도와 관계없이 반복적이고,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관련된 트라우마를 받은 환자들에게서 공통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나타나는 것에 주목을 하게 되었는데요, 그 이유는 장기적인 대인간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이 기존에 알려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증상(침습적 사고, 과각성, 회피, 부정적 인지변화)들 이외에도 정서나 충동 조절의 어려움, 해리 증상, 신체화 증상, 성격적 병리 등을 같이 나타냈기 때문이죠. 주로 가정폭력, 아동학대, 성매매, 학교폭력 등의 외상사건이 이에 해당됩니다.
이러한 장기간의 반복적인 대인간 폭력을 '복합 외상'(comlpex trauma)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외상 후 나타나는 위와 같은 증상들을 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합니다. 이 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아직 공식적인 미국 정신의학 진단명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점차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들은 장기적으로 외상을 겪으면서 자기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으로 바뀌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등 성격 특성이 변화하게 되고 이는 외상을 경험할 당시의 연령이 낮을수록 더욱 뚜렷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무래도 성격발달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반복적인 트라우마를 입는 것은 성인기에 트라우마에 노출되는 것과는 차이가 있겠지요.
이처럼 과거의 사건은 과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행하는 대부분의 판단이나 행동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사연 주신 분처럼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괴로움을 겪고 계시는 분들이 과거를 잊지 못하는 것은 의지의 문제도, 비정상도 아닙니다. 과거의 사건이 인지구조나 성격에 영향을 미쳐 그 괴로움이 현재진행형으로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죠.
다만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과거의 일들이 현재 나의 감정과 인지구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를 찾는 작업을 하면서, 아팠던 과거가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듯이, 현재에 이루어지는 일들이 미래를 바꾸기 때문이죠.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하셔서 그간의 어려움을 털어놓으시면서 좀 더 나은 현재를 위한 도움을 받아보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부디 조금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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