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무엇을 먹고 자라나는가? - 스포츠와 폭력
[정신의학신문 : 광화문 숲 정신과, 정정엽 전문의]
겨울 스포츠의 꽃인 배구계가 된서리를 맞고 있다. 쌍둥이 배구 선수로 유명한 이재영과 이다영 자매가 학창 시절 배구부 동료 선수들에게 잔인한 폭력을 오랫동안 행사했다는 내용의 폭로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과거에 행해졌던 학교 폭력에 대한 폭로는 남자 배구를 거쳐 스포츠계 다른 종목으로 이어지면서 연예계로 퍼져나갔고, 이제는 사회 일반으로까지 일파만파 확산 중인 추세다. 얼마 전 자신이 당한 성범죄를 고발하는 ‘미투 운동’이 일어났던 것처럼 자신이 예전에 겪은 학교 폭력 사실을 폭로하는 ‘학폭 미투’로 번져 가는 양상이다.
여론이 악화하자 두 선수가 소속된 구단과 배구협회는 진화에 나섰다. 남은 연봉의 지급을 중지하고, 무기한 출전을 정지하며,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하는 등의 조치를 한 것이다. 방송에 출연했던 영상도 삭제되고, 집행 중이던 광고도 비공개로 전환되었다. 하루아침에 부와 명예를 잃고 선수 생명마저 상실할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라인상에서는 아예 선수 자격을 박탈하고 영구 퇴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너무 가혹한 것 아니냐는 일부 체육계의 우려는 여론에 떠밀려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냉정하게 짚어 봐야 할 것이 있다. 하나는 일벌백계만이 이 같은 사건의 유일한 해결책이며 향후 이런 일의 재발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가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학교 폭력이나 스포츠계의 폭력이 개인의 일탈 차원에서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구조적이고 뿌리 깊은 악습에 기인한 것인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폭력과 분노와 공격성을 구분하지 않고 뭉뚱그려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폭력은 분노가 일었을 때 발생하며, 공격성을 참지 못해 벌어진다고 여기기에 딱히 구분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 세 개념은 구분되어야 한다. 폭력(violence)은 신체에 해를 가하는 등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물리적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하고, 분노(anger)는 자신의 요구가 실현되지 않거나 부정 또는 저지당한 데 대한 저항의 결과로 생기는 정서를 가리키며, 공격성(aggression)은 상대방을 해치려는 의도와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시도하는 모든 행동을 의미한다. 신체적인 위해는 물론 정신적으로 상처와 고통을 주는 행위도 포함된다. 이렇게 구분한다면 폭력도 단순하게 일시적으로 발생한 폭력이냐 아니면 폭력성을 가지고 계속해서 자행된 폭력이냐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폭력이 발생했을 때 의도된 폭력인가 감정적으로 행해진 폭력인가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행된 폭력인지 순간적인 감정을 참지 못해 벌어진 폭력인지를 구분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목적을 가지고 의도된 폭력이라면 폭력이 도구로 사용된 구조적인 원인을 깊이 분석하고 따져봐야 하지만, 단지 순간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시적 폭력이라면 개인의 일탈 차원에서 진단하고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폭력의 결과와 그 폭력이 발생하게 된 보이지 않는 이면을 상세히 따져 본 후 적절한 처벌과 치료가 이루어지는 게 현명하다.
지금 체육계에서 드러나는 폭력의 양상을 보면 오랫동안 내부에서 만들어지고 이어져 오면서 관습처럼 굳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때부터 프로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운동해서 성공하려면 고된 훈련을 이겨내야 하고, 감독이나 코치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며, 선배들이 잘돼야 후배들도 잘될 수 있다는 생각에 상명하복의 문화가 정착되고, 합숙과 전지훈련 등을 반복하면서 폐쇄적이고 고립된 집단 문화가 형성되다 보니 폭력이 자연스럽게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무섭게 대해야 말을 잘 듣고, 팀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려면 최소한의 폭력이 필요하며, 후배 시절에는 약간 힘들어도 선배가 되면 다 보상받는다는 비뚤어진 보상심리가 폭력이 관행이 된 이런 풍토를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운동은 맞아가며 배워야 잘할 수 있는 거야.”
“군기가 딱 들어 있지 않으면, 팀 스포츠가 제대로 될 수가 없어.”
이 같은 전근대적인 사고방식과 군대식 조직 문화가 학교 폭력과 스포츠 폭력을 유지해 온 폐단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학폭 미투’는 곪을 대로 곪은 스포츠계의 어두운 면이 마침내 터져 버린 것이다. 차제에 스포츠계는 구조적이고 뿌리 깊은 폭력의 악습을 끊어내기 위한 뼈를 깎는 제도 개혁과 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일부 선수들의 철없던 시절 행동으로 치부해서 이 위기만 넘기면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위기가 오히려 기회일 수 있다.
한국 배구연맹에서는 앞으로 학교 폭력과 성범죄 등에 깊이 연루된 선수들은 프로 무대에서 뛸 수 없도록 규정을 바꾸겠다고 발표했다. 학교 폭력과 관련해 한국 배구연맹에 제출한 서류의 내용이 허위로 드러날 경우, 해당 선수는 영구제명 등의 중징계를 받게 된다. 국가대표 선발 과정에서도 경력과 실력뿐 아니라 학교 폭력에 연루되었는지 등 평소의 평판도 반영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구단에서도 선수와 계약을 맺을 때 과거의 품행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추후라도 드러날 경우, 이를 연봉이나 대우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명문화해서 시행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문제가 터졌을 때야 부랴부랴 규정에도 없고 계약서에도 없는 처벌을 본보기식으로 내리는 것은 선수에 대한 이중 처벌일 수 있다.
진정한 해결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화해와 치유다. 당연히 가해자의 진정성 있는 사과가 먼저다. 피해자를 찾아가 직접 용서를 구해야 한다. 피해자의 아픔과 고통의 목소리를 온전히 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 피해자와 그 가족이 입은 깊은 상처를 치유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미봉책 이어선 안 된다. 가해자의 부모가 나서서 가해자에게 용기를 줘야 한다. 그런 다음 가해자 역시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법적 제도적 대가를 치른 후 소속 구단이나 협회와 의논하여 자숙과 치유의 기간을 갖는 게 좋다.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정상적인 일상생활과 선수 활동을 할 수 있는 인간성 회복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아직도 우리나라 학교 체육은 엘리트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렇다 보니 폐쇄성과 강압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 자녀가 소속된 학교 운동부에서 폭력이 자행되고 있을 때, 부모가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하급생일 때는 피해자였지만, 상급생이 되면 가해자가 된다. 조금만 참고 견디면 졸업이다.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어차피 한솥밥을 먹어야 할 사람들이다. “얘는 조금 맞았다고 코치나 선배를 신고하는 못된 아이야.” 이런 낙인이 찍혀 따돌림을 당할까 봐 내 자녀가 폭력을 당했는데도, 부모가 나서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쉬쉬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잘못된 문화와 관행을 과감히 끊어내려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폭력은 무관심과 비밀을 먹고 자란다. 나만 괜찮으면 된다고 못 본 체하고,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돌린다면 폭력은 계속 자라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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