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 마음속 깊이 서로를 믿는다

황인환의 [시(詩)와 함께하는 마음공부] (12)

2021-01-09     황인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 여의도 힐 정신과, 황인환 전문의] 

 

사랑하기 - 마음속 깊이 서로를 믿는다
: 폴 엘뤼아르의 ‘우리 둘이는’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한 해는 모두가 힘겨웠습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버거운 시간들이었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서 늘 제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고통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작년에는 유독 이 질문의 횟수가 많아졌고, 무게감 또한 더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은 나와는 무관한 외부에서 오는 건가요? 아니면 나 자신의 내부로부터 오는 건가요?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과 어려움은 내 의지나 계획과는 아무 상관없이 불쑥 찾아오는 게 많습니다. 피할 시간도 없고 거부할 수단도 없습니다.

하지만 고통을 받아들이고 느끼고 수용하고 극복하고 깨닫는 건 나의 몫입니다. 고통 때문에 더 빛나는 인생이 될 수도 있고, 고통 때문에 좌절하고 무너져 내릴 수도 있습니다.

매년 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를 뽑아 발표합니다. 교수신문에 따르면 2020년 교수들이 선정한 사자성어는 ‘아시타비(我是他非)’라고 합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라는 뜻이라네요. 기존의 사자성어가 아니고 새로 만들어진 말입니다. ‘내로남불’이라는 시쳇말이 있습니다. 나와 우리 편에는 한없이 관대하고, 다른 사람과 상대편에는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를 일컫습니다. 윤리와 도덕, 사고와 가치의 모든 판단 기준이 나와의 친분이나 관계에만 맞춰져 있는 합리적이지 못한 사람들의 행동양식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지치고 고단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에게 ‘아시타비’를 일삼는 지도층이나 선동가들의 언행은 마음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킵니다. 이런 극한 대립과 소모적 투쟁 일변도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달래고 위로할 수도 없습니다.

 

흉흉한 민심이 이어지는 이 시기에 생각나는 시인이 있습니다.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시인 폴 엘뤼아르입니다. 그는 ‘자유의 시인’으로 불립니다. 누구보다 현실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피가 뜨거운 남자입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전선으로 나가 싸웠습니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을 때는 인민전선에 참가해 레지스탕스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그의 시는 평화, 정의, 자유, 연대를 부르짖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에는 정치운동에 뛰어들어 독일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활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1942년에는 영국 공군이 그의 시집을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에 뿌리기도 했다니 참 대단합니다. 이즈음 그는 공산당에 가입하기도 했습니다. 가히 시 쓰는 전사의 삶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시는 대립과 투쟁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현실 참여 속에 대립과 투쟁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도 않고, 사람들을 달래고 위로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그는 인간의 본성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끝없이 사랑을 노래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 사람들을 달래고 위로하는 것, 지치고 고단한 대중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건 오직 사랑뿐이라는 걸 알게 된 겁니다. 그의 시는 좌우익을 불문하고 프랑스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사랑받는 시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를 자유의 시인보다 ‘사랑의 시인’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사진_픽사베이

 

우리 둘이는 손을 맞잡고
어디서나 마음속 깊이 서로를 믿는다.
아늑한 나무 아래 어둑한 하늘 아래
모든 지붕 아래 난롯가에서
태양이 내리쬐는 빈 거리에서
민중의 망막한 눈동자 속에서
현명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들 곁에서라도
어린아이들이나 어른들 틈에서라도
사랑은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우리들은 그것의 확실한 증거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음속 깊이 서로를 믿는다.

 

그가 쓴 ‘우리 둘이는’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어떠신가요? 참 좋죠? 마음이 편안해지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시입니다. 레지스탕스로 이름을 떨치던 불굴의 전사 이미지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영락없는 애틋한 서정시입니다.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이 어디서든 마음속 깊이 서로를 믿는다면, 그 사랑으로 인해, 그 믿음으로 인해 세상은 환하고 아름답게 변할 겁니다.

좋을 때만, 편안할 때만, 마음에 들 때만, 배부를 때만, 나에게 잘할 때만, 내게 이익이 생길 때만,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일 때만, 우리 편일 때만, 손을 맞잡고 마음속 깊이 서로를 믿는 게 아닙니다. 그렇지 않을 때도, 마음속 깊이 서로를 믿습니다. 온전한 믿음, 그것이 사랑입니다.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증거,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뜨거운 가슴을 가졌던 시인, 폴 엘뤼아르. 그는 건강했을까요? 전쟁터를 누비며 레지스탕스로 활약했으니 당연히 건강했을 겁니다. 체격도 탄탄하고 다부졌겠죠. 영화 <터미네이터>의 아놀드 슈왈제네거나 <람보>의 실베스터 스탤론 정도를 연상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파리 교외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 폐결핵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스위스 산골마을 다보스에서 요양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타고난 약골이었던 거죠. 그 무렵 연약한 육체에 깃든 가냘픈 영혼에 시적 감수성이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몸이 약했기 때문에 시인이 된 거라고 할 수 있죠. 그의 약함은 그의 강함이기도 했고, 그의 강함은 그의 약함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1952년 50대 중반의 나이에 많은 지식인들의 애도 속에 세상을 등진 이유도 과로와 협심증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보다 강렬하게 사랑을 노래했던 사랑의 시인, 폴 엘뤼아르. 그의 사랑을 어땠을까요? 많은 여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을까요? 아니면 많은 여인들에게 사랑을 주었을까요? 주옥같은 사랑 시를 많이 남겼으니 응당 감동적인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었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1917년 러시아 소녀 갈라를 만나 결혼했지만, 그녀는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를 사랑하게 되어 그를 떠났습니다. 그는 1934년 두 번째 아내인 마리아 벤즈와 결혼했습니다. 뉘쉬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그녀는 그에게 풍부한 영감과 사랑을 불어넣어 주었지만, 그녀 역시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와 염문을 뿌리면서 그를 배신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화가들에게 아내를 빼앗긴 겁니다. 폐결핵으로 고통당하던 그는 실연의 아픔이라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두 번이나 깊은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한 그의 생각과 믿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폴 엘뤼아르. 그는 묘한 매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타고난 약골이었음에도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신념으로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했고, 번번이 사랑하는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겼음에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과 사람을 구원하는 에너지는 사랑밖에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시인은 영감을 받는 자가 아니라 영감을 주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이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를 바라지 않고, 내가 세상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고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이 나에게 가져다줄 것만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을 위해 해야 할 일을 꿈꾸고 행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초현실주의자였지만, 시의 사명은 인간의 우애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여러 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그리고 현실 정치를 체험하면서 사랑과 자유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의 시에 진실성이 있고 순수함이 있는 거겠죠. 아직도 많은 사람이 좌우익을 떠나 그의 시를 사랑하고 기억하며 노래하는 것은 그의 생각과 믿음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21년은 희망의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살맛 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를 탓하고 비판하고 욕하는 세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존중하고 위로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유와 사랑이 공기처럼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장과 사원이, 고용주와 고용인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권력자와 국민이,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이,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식이, 교사와 학생이, 남자와 여자가 손을 맞잡고 어디서나 마음속 깊이 서로를 믿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 세상을 더 건강하고 활기차게 만드는 것은 돈이나 약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같은 바람과 소망을 담아 폴 엘뤼아르의 시 ‘우리 둘이는’을 암송하면 좋겠습니다. 시가 너무 길어 다 외우기 어렵다면, 딱 한 구절만이라도 말이죠.


우리 둘이는 손을 맞잡고
어디서나 마음속 깊이 서로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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