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지 않은 제야의 종

2021-01-02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결국 제야의 종은 울리지 않았다.

매년 12월 31일 밤이 되면 온 가족이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곤 했다. 연예대상이니 가요대전이니 하는 프로들을 배경음악처럼 틀어두고 12시가 되도록 기다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11시 59분 50초부터는 화면을 꽉 채우는 숫자들이 수많은 군중들의 목소리와 함께 10,9,8,7 하며 카운트다운을 했고, 그러고 나면 어김없이 대여섯 명의 정치인이며 연예인들이 손을 맞잡고 제야의 종을 울렸다. 늘 기대보다 조금 둔탁하던 그 종소리. 하지만 어딘지 뭉클해지는 그 울림. 그렇게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것이 일종의 의식이었다.

하지만 2021년 신축년의 시작은 그렇지 못했다. 보신각의 큰 종은 외로이 침묵했다. 제야의 종 타종행사가 취소된 일은 지난 67년 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오래된 쇠종 하나가 울리지 않았다. 달력의 새해가 다가온 것은 똑같다. 하지만 못내 씁쓸하다.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다.

 

사진_서울시 제공

 

제야의 종은 새해를 맞는 의식일 뿐, 종이 울리지 않는다고 시간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아니 애초에 달력이라는 것부터가 연속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인위적으로 뚝 잘라 나눠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면 똑같이 흘러가는 하루하루들을 연 단위로 잘라 나눈 이유부터가 바로 이 의식을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해를 나누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새해의 분기점은 대부분의 문명이 위치했던 북반구의 겨울 한가운데에 해당하는 날이다. 새로운 농사를 준비하면서 풍년을 기원하기에 적절한 시점이다. 그 임의적인 구분점에서 치러지는 의식적인 행위가 바로 새해맞이이다.

 

인류학자 유발 하라리는 모든 문명에서 의식(儀式)의 역할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와 규칙을 실체화(實體化)하는 데에 있다고 이야기했다. 마을의 질서를 유지하는 힘은 웃어른에 대한 예의범절로 실체화되며, 군대를 조직하는 힘은 제식으로 실체화된다. 모호하지만 분명히 필요한 심적 에너지가 실제 사회적 관계에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요식적 행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두 함께 카운트 다운을 하고, 큰 종을 울리고, 오래도록 연락하지 않던 지인에게 연하장을 보내고, 덕담을 나누는 행위는 새해를 맞이하는 의식 행위이다. 그 의식행위는 그간을 돌아보고 앞으로를 새로이 계획하고자 하는 의지를 구체화시킨다. 소중한 기억을 지키고 조금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추상적인 염원을 실현시키는 첫걸음이 된다.

 

우울증과 불안장애 등 많은 정신질환에 활발히 적용되고 있는 인지행동치료(CBT; Cognitive Behavioral Therapy)는 생각과 감정을 구체적인 의식의 실천을 통해 변화시키는 치료라고 말할 수 있다.

무의식적인 인지 과정과 감정 반응은 무척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다. 대강의 '느낌'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는 파악하기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모호한 과정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모종의 의식(儀式)적인 행위가 필요하다.

인지행동치료가 구체화된 프로토콜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치료자는 프로토콜을 바탕으로 환자에게 매일매일 숙제를 부여한다. 사고기록지를 통해 생각을 구체적으로 분류하여 손으로 직접 기록해보도록 한다. 정해진 규칙에 따른 상황 대응책을 미리 준비하여 체계적으로 불안 노출을 훈련하기도 한다.

환자는 치료자와 함께 만들어가는 그 숙제들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마음의 변화, 행동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조금씩 병에서 벗어나 새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마음을 행위로 구체화함으로써 현실이 변화될 수 있다.

 

2020년은 모두에게 힘든 해였다. 물론 그 역경은 2021년인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 세계의 모든 문을 걸어 잠갔다. 국가의 문과 가게의 문, 우리 집 현관의 문을 걸어 잠그고, 그걸로도 모자라 전 세계 사람들 마음의 문에 빗장을 가로질렀다. 모두가 서로를 향한 마음의 문을 닫고 분노와 탄식만을 난사하고 있다.

물론 현재 다수의 국가에서 백신 접종을 시작하였고, 치료제가 개발 중이다. 코로나 사태는 백신과 치료제로 인해 막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남긴 마음의 폐쇄, 타인을 향한 불신과 혐오의 습관은 백신과 치료제만으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고,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바이러스가 없던 그 때로의 회귀를 염원할 것이 아니라, 다가올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각자의 일상에 불신과 경계의 습관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은 모호한 희망과 바람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직 행동으로 구체화된 염원만이 현실로 이어질 수 있다. 요컨대 각자의 의식(儀式)이 필요하다. 새해를 맞이하는 타종행사처럼, 혐오와 인내의 삶을 지나 보내고 통합과 화합의 삶을 맞이하기 위한 규칙과 숙제가 필요하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금지한 것은 기존의 의식일 뿐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갈라둔 우리들의 마음을 이어 붙이기 위해서는 새로운 의식이 필요하다. 얼굴을 맞대지 못하더라도 함께 있음을 확인하고 표현하기 위한 새로운 의식. 배려와 사랑과 염려를 잃지 않기 위한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

주기적으로 사람들과 연락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볼 수도 있다. 함께 식당에 가지 못하는 대신 직접 만든 음식이나 선물을 보내줄 수 있고, 옆에 앉아 있진 못하더라도 함께 동시에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다.

밖에서 뛰지 못하는 대신 정해진 시간에 집에서 할 수 있는 운동들을 규칙적으로 하거나, 재택근무를 하더라도 정해진 업무시간을 지켜가며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무너져버린 일상을 되찾기 위한 의식. 새로운 삶의 리듬을 찾기 위한 의식이 필요하다.

타인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을 해소하는 의식으로써 감사와 배려를 습관처럼 연습해볼 수도 있다. 배달 음식을 주문할 때 배달원에게 감사의 쪽지를 남길 수도 있다. 하루에 한 개씩 일부러라도 SNS에서 타인에게 선플달기를 실천해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과제나 의식을 하듯 어느 정도의 요식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규칙을 만들고 주기와 횟수를 지키려 노력해보는 게 좋을 수도 있다. 서른세 번 묵묵히 종을 치듯 정해둔 규칙에 따라 묵묵히 의식을 실천해보는 것이다. 점차 찾아올 변화를 기다리며.

 

신축년 제야의 종은 침묵했다. 하지만 분명 변화는 찾아올 수 있다. 모두의 새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들 마음속 각자의 종을 울려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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