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그까짓 거, 뭐가 중요한데? - 내 감정과 친해지는 법

조장원의 ‘직장 남녀를 위한 오피스 119’ (20)

2020-12-30     조장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 민트 정신과, 조장원 전문의] 

 

조 차장은 부서 내에서 감정 조절을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흥분할 만한 일이 생겨도 좀처럼 들뜨지 않고 차분하게 대응해서 상황을 마무리하고, 기분이 상할 만한 좋지 않은 일을 맞닥뜨려도 내색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처해서 일을 매듭짓는다. 누가 뭐라 해도, 무슨 일이 벌어져도 크게 놀라거나 맞대응하지 않는 냉철한 사람이다. 그런 조 차장을 부러워하고 따르는 후배들이 많다. 감정 조절을 잘하지 못해 상사에게 꾸지람을 듣거나 낭패를 당한 적이 있는 사람들이다.

주변에서 보기에는 조 차장이 이렇듯 감정 조절을 잘하는 것 같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지가 않다. 낮에는 누구보다 정신력이 강한 사람인 듯 보였으나 퇴근하고 어둠이 드리우면 쌓아두었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마음을 어지럽힌다. 화를 내지 않고 꾹 눌러 참았던 감정, 마음껏 호탕하게 웃어넘기지 못했던 감정, 마음을 다해 공감하고 위로해 주지 못했던 감정, 상사의 칭찬과 격려에 흔쾌히 감사를 표하지 못했던 감정 등이 밀물처럼 올라온다. 이런 날은 비 맞은 것처럼 몸까지 축 처진다. 술을 마시면서 자신의 감정을 복기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

‘이미 지난 일인데, 자꾸 생각하면 뭐해?’

술을 마시면서 감정의 기억들을 떨쳐 버리려 애를 쓰지만, 그럴수록 기억은 더욱 또렷해진다.

심지어 어떤 날은 저녁때 기분이 좋지 않아 술을 마시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왜 기분이 안 좋은 거지?’

현재 자신의 감정이 어떤 상태인지조차 분명히 인지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조 차장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그는 감정보다는 이성이 중요하다면서 늘 자신의 감정을 등한시했다. 어렸을 때의 일이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되는 거야. 다른 사람에게 얕잡아 보이거나 약하게 보일 수 있어.”

부모님은 자신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이렇게 가르쳤다.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고, 파안대소를 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나약한 사람이나 하는 행동이라고 타일렀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길들여졌다. 강한 사람이 되려면 감정을 숨겨야 하는 거라고 믿은 것이다. 학교 다닐 때는 물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이런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 사이 그의 생각은 확고한 태도로 굳어졌다.

포커페이스(Poker Face). 아무 감정도 표출하지 않는 무표정한 상태를 이르는 단어다. 포커를 할 때, 자신이 가진 패의 좋고 나쁨을 상대편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표정을 바꾸지 않는 데서 유래했다. 조 차장은 자신이 포커페이스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밤만 되면 낮에 등한시했던 감정이 밀려와 번민의 밤을 보내야 하는 자신을 막연히 포커페이스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조 차장은 최근 상사에게 계속 핀잔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동료나 후배들 앞에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행동했다. 이후 배가 계속 아팠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약을 지어다 먹었지만, 좋아지지가 않았다. 주말에는 좀 나아지는데, 일요일 저녁부터 다시 아팠다. 월요일 출근해서 직장 사람들을 다시 만나야 한다는 게 부담스럽고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이었다.

 

사진_픽셀

 

어렵사리 진료실 문을 두드린 조 차장의 사연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홀로 얼마나 힘겨운 시간을 보냈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쓸모없는 감정은 없다. 우울, 불안, 분노, 짜증 그 어떠한 것도 쓸모없는 게 아니다. 현재의 상황과 과거의 상황이 만들어 내는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다.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란 자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감정적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심리 의식이나 행위를 가리키는 정신분석 용어다. 방어기제 중에 억압(repression)과 억제(suppression)라는 것이 있는데, 두 방어기제 모두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동일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억압은 감정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억누르는 것이고, 억제는 감정을 의식한 후에 억누르는 것이다. 억압은 미성숙한 방어기제이고, 억제는 억압에 비해 매우 성숙한 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다.

감정을 의식하지 못한 채 억누르기만 하는 사람에게서는 감정을 처리하지 못하다 보니 신체화 증상(내과적 이상이 없는데도 다양한 신체적 증상을 반복적으로 호소하는 상태)이나 중독, 식이장애가 자주 관찰된다. 불편한 감정들을 제때 적절하게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신체 질병에 걸리기 쉽다. 마음속에 켜켜이 쌓아둔 감정의 앙금이 몸의 어딘가에 이상증세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잘 처리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의 감정이 어떠한지 이해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는 부모가 도와줘야 한다. 감정을 잘 다스리고 조절하는 아이로 성장하려면 부모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감정을 잘 처리해 주는 부모를 보면, 공통점이 발견된다.

먼저 아이의 감정을 알아주고, 아이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철수야, 지금 화났어?”
“영희야, 지금 불안하구나?”

이렇게 잘 알아주면 아이는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고 표현하게 된다.

다음은 아이의 감정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래, 화날 만하구나. 화나도 괜찮아.”
“이래서 불안했구나? 맞아, 나라도 그랬을 거야.”

마지막으로 아이를 안심시켜 주는 것이다.

“엄마 아빠가 옆에 있으니까 괜찮아. 안심해도 돼.”
“이런 건 이렇게 하면 되니까 곧 마음이 나아질 거야.”

이렇게 ‘인지-인정-안심’의 세 단계로 아이의 감정을 다스리는 연습을 매일 같이 해야 한다.

어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자신의 감정을 똑바로 인지하고, 그 감정을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안정적으로 다스려 안심할 수 있도록 조절하면 어떤 감정이 생기든 쌓아두지 않고 적절히 해소할 수 있게 된다. 위 사례에서 조 차장의 경우에도 자신의 감정을 인지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으니까 안심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 채 항상 불안과 두려움, 불편함과 스트레스에 갇혀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감정은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제대로 알아주고 다스려야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내 감정을 더 잘 이해해 주고 친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 본 기사에 등장하는 사례는 이해를 돕기 위해 가공된 것으로 실제 사례가 아닙니다.

 

 

*  *  *
 

정신의학신문 마인드허브에서 마음건강검사를 받아보세요.
(20만원 상당의 검사와 결과지 제공)
▶ 자세히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