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옆에 약이 없으면 너무 불안해요 - 안전추구행동

조장원의 ‘직장 남녀를 위한 오피스 119’ (19)

2020-12-26     조장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 민트 정신과, 조장원 전문의] 

 

김 부장은 공황장애 15년차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공황장애가 시작된 후 치료와 재발이 수차례 이어진 다음 마지막으로 치료받은 게 10년 전이었다. 그 뒤 5년 동안이나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답답한 증상도 불안한 증세도 없었다. 자신이 공황장애를 앓았던 사람인가 싶게 편안한 일상을 유지했다. 가족이나 회사 직원들도 김 부장과 공황장애를 연결 짓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했다.

그런데 김 부장에게는 공황장애가 발생한 뒤부터 특이한 버릇이 생겼다. 의사가 처방해준 항불안제를 지갑에 넣어 가지고 다니게 된 것이다. 지갑에 항불안제가 있으면 어딜 가든 안심이었다. 공황장애 증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지갑에는 언제나 항불안제가 들어 있었다. 그것이 그에게는 일종의 호신용품이나 보험처럼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안전장치였던 셈이다.

혹시 지갑을 가져오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회사 책상 서랍에도 항불안제를 넣어두었고, 집에 오면 편한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으니까 혹시나 해서 서재 서랍 안에도 항불안제를 챙겨두었다. 자신이 어느 곳에 있든 늘 곁에 항불안제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다. 잠깐 누굴 만나기 위해 커피숍에 들르거나 화장실에 갔을 때 항불안제가 없다고 생각하면 괜히 초조해졌다.

 

얼마 전 퇴근길이었다. 차를 정비소에 맡겨둔 터라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기 때문에 김 부장은 집으로 가는 지하철 열차에 탑승했다. 몇 개 역을 지났을 무렵 무심코 양복 상의를 만져 보니 안주머니에 지갑이 없었다. 바지 주머니까지 다 뒤졌지만, 지갑은 어디에도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책상 위에 두고 온 것 같았다. 급하게 나오느라 깜빡한 것이다. 이때부터 김 부장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불안이 엄습했다. 다리에 맥이 풀리고 이마에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약도 없는데, 여기서 쓰러지면 어떻게 하지? 아, 정말 큰일인데…….’

무려 5년 동안이나 아무런 증상이 없었는데도, 김 부장은 현재 약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공황장애 초기에 겪었던 악몽이 되살아났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김 부장은 조심스레 다음 역에서 내려 지하철 역사를 빠져나왔다. 그런 다음 인근에 있는 병원 응급실을 찾아갔다. 담당 의사에게 증상을 설명한 뒤 침대에 누워서야 비로소 마음이 안정되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금만 안정을 취하시면 괜찮아질 겁니다.”

담당 의사의 말이 들렸다. 그런데도 시간이 조금 지나자 김 부장은 또다시 지갑 생각이 났다.

 

사진_픽사베이

 

김 부장처럼 지갑에 항상 약을 가지고 다니거나, 자신이 자주 머무는 곳마다 약을 챙겨둬야만 안심이 되는 행위는 안전추구행동(Safety Seeking Behaviors)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안전추구행동이란 불안한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고 감정으로부터 회피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주의를 분산하든가, 상황을 회피하든가, 안정감을 주는 대상에 의지하면 불안감이 줄어든다.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물질에 의존하기도 하고, 어떤 행위를 반복하거나 생각을 떠올리기도 한다.

‘오늘 잠을 못 자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면 불면증을 극복하기 위해 밤마다 술에 의존하게 된다.

‘혹시 균에 감염되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작은 행동 하나를 한 뒤에도 반복적으로 손을 씻는다.

‘지하철 안에서 불안감이 심해지면 어떡하지?’

이런 염려가 계속되면 아예 그런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지하철을 타지 않는다.

 

사실 김 부장 같은 경우는 이 같은 안전추구행동을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위는 일시적으로 감정적인 불편함을 없애주기는 하지만, 불안을 느끼는 대상에 대한 불안감을 없애거나 줄이기보다는 더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회피할 때마다 안도감을 느끼고, 이러한 안도감이 불안을 느끼는 대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한층 강화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비둘기 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길을 걷다가 저만치 있는 비둘기를 목격했다고 하자. 이때 ‘아, 저기 비둘기가 있구나. 얼른 피해서 가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길을 돌아갔다면 비둘기를 대면하지 않아 비둘기 공포증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역시 피하길 잘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람에게 비둘기는 언제나 피해야만 하는 무서운 존재로 남게 된다. 일시적으로는 편할지 몰라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으며, 비둘기에 대한 공포감은 더욱더 악화할 수 있다.

안전추구행동을 하면 안 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이런 행동 자체가 또 다른 불안의 시작이 되는 까닭이다. 안전을 추구하고자 어떤 행동을 취했는데, 그 행동으로 인해 생각지도 않은 불안이 초래되는 것이다. 김 부장 사례처럼 ‘약이 없으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은 약이 없는 모든 곳에서 쓸데없는 불안을 유발한다. ‘지하철 열차 안에서 불안이 찾아오면 나는 무조건 내려야 하는데, 만약 내리지 못하면 어떡하지?’ 이런 불안은 버스나 택시나 비행기를 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꼭 필요할 때만 복용하는 필요시약은 안전추구행동이 될 수도 있고, 올바른 치료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공황장애로 처음 진단받으면 필요시약을 처방하는 경우가 있는데, 정해진 시간에 복용하는 약 외에 불안이 나타났을 때를 대비해 상비하도록 한다. 불안을 느낄 때만 복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초반에 공황발작이 반복될 때 치료에 대한 기대나 자신감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따라서 어느 정도 증상이 조절되면 끊어야 하므로 오래 복용하도록 처방하지 않는다.

 

안전추구행동이 아니라 조절 가능한 치료 방법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 번째로 필요시약에 의존하는 행위가 내 불안을 어떻게 낮추는지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불안을 낮추는지를 파악하고 있어야 꼭 필요할 때만 약물을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해야만 지나친 약물의 남용과 의존을 예방할 수 있다. 이 약이 내 불안을 어떻게 줄여주는지 알고 있으면 증상이 안정되었을 때 언제든 복용을 중단할 수가 있다.

두 번째로 필요시약 외에 다른 대안과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어야 한다. ‘이 방법 아니면 안 돼!’가 아니라 ‘이 방법이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지 뭐.’ 이런 유연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필요시약은 이것저것 해보고 안 되면 사용할 수 있는 대안 중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대안이 오직 하나밖에 없다면 그것에 더 의존하게 되고, 여차하면 그것부터 찾을 수가 있다. 약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자신의 불안한 감정을 다룰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세 번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근본 문제인 불안이라는 감정을 자꾸 피하거나 외면하려고만 할 게 아니라 직접 대면해서 파악하려고 해야 한다. 무조건 회피해야 할 대상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내가 왜 불안한지, 불안할 때 내 반응은 어떤지, 불안을 낮춘 행위가 있다면 어떻게 불안을 낮췄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봐야 한다. 내 불안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 본 기사에 등장하는 사례는 이해를 돕기 위해 가공된 것으로 실제 사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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