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Mail] 우울하지는 않지만, 안 좋은 생각만 들어요
[정신의학신문 : 강남 푸른 정신과, 신재현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고등학생입니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고 싶은데 부모님한테 절대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답답한 마음에 이곳에라도 글 남겨봐요. 저는 초5 때 친구랑 자살시도를 하려 했으나 실패한 후 계속해서 자살사고가 이어진 것 같아요. 중3 때부터 고1 때까지 엄마가 죽겠다는 말을 하고, 매일 울고 하는 모습들을 지켜봤어요. 제가 집에서는 눈치 없는 척, 긍정적인 척해서 엄마가 저한테 자기 힘든 거 털어놨었거든요.
원래의 저는 비관적이고 평균 텐션이 낮은 사람이에요. 예전에는 자해도 하고, 자살충동도 심했어요. 지금은 그때보다 상황이 나아진 건 아니지만 조금 무덤덤해졌고, 스트레스도 덜 받는 거 같아요. 밤마다 감정 기복이 좀 있긴 하지만 전처럼 견디기 힘들 정도는 아니고 오히려 무감각해진 듯해요. 확실히 이제 자해도 안 하고, 밤마다 극심한 자살충동에 시달리지도 않아요. 근데 요즘에 자꾸 자살에 대한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들 때가 있어요. 예를 들어 횡단보도를 기다리고 있으면 저 도로에 뛰어들어서 차에 치이고 싶다, 다리를 지나가면 다리에서 떨어지고 싶다, 바다를 보면 저기 빠지고 싶다 등등 자꾸만 죽는 상상을 해요.
별로 우울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생각들이 갑자기 드니까 너무 혼란스러워요. 친구랑 같이 얘기하고 있다가도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고, 밥을 먹다가도 문득 이런 생각을 해요. 아무래도 이런 생각을 하면 표정도 조금 굳게 되고, 제 세상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친구랑 있을 때는 겨우 정신줄 붙잡고 티 안 내려고 노력해요. 또 요즘 무언가 큰 일을 결정할 때 만약 생각대로 잘 되지 않으면 그냥 죽어버리면 되지 라는 생각에 조금 마음 편히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거 같아요. 이런 생각 자체를 전제로 깔면 안 되는데 자꾸만 이렇게 되네요.
자살에 대해 무덤덤해졌다고 해야 하나. 그냥 누가 죽으라면 죽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전에 마음에 쌓인 게 아직까지 트라우마처럼 남아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스트레스가 있는데 너무 적응이 돼서 힘든데 알아차리지 못하는 걸까요. 정말 궁금한 건 우울증이 아니어도 자살생각을 몇 년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나요? 이런 경우에도 정신과 진료를 받나요? 감사합니다.
답변)
안녕하세요, 강남푸른정신건강의학과 대표원장 신재현입니다.
아직 많지 않은 나이에 힘든 생각을 짊어지고 살아갈 질문자님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이야기가 얼마나 위안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부디 힘내시길 바랍니다.
인간은 자신의 성장 과정에서 겪는 경험들에 많은 영향을 받아요. 질문자님께서 ‘트라우마’라고 이야기한 많은 경험들도 거기에 속합니다. 글에 자세히 적혀있지는 않지만 어머니의 우울함과, 또 그로 인한 부정적일 수 있는 양육 환경에 영향을 받았을 거라 생각도 듭니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삶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환경에 매일 노출된다면, 나의 삶 또한 부정적인 색채에 물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눈 앞에 어떠한 필터를 만들어냅니다. 그 필터는 내 삶에서 많은 것들을 ‘부정적으로’ 걸러서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리 부정적이지 않은, 심지어 긍정적인 일들 마저도 말이에요. 이를 스키마(schema)라 합니다. 세상을 인지하는 일종의 틀이 만들어지는 셈이지요.
부정적인 스키마는 부정적인 생각, 감정, 행동을 만들어냅니다. 세상에 대한 비관, 죽음에 대한 지속적인 생각, 자해 행동 같은 것들입니다. 질문자님께서 겪는 경험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지금 현재의 상태는 우울증에 가까운 상태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우울감은 뚜렷하지 않다 하더라도 세상에 대한 무망감, 자살사고, 잦은 자해 행동 등은 우울증을 시사하는 증상들입니다. 하지만 표면적인 우울증의 증상보다 더 중요한 건 그 기저에서 작동하고 있는 자신과 세상을 받아들이는 부정적 시각, 즉 스키마의 문제라 생각합니다.
먼저 전문적인 평가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맞는 도움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아직은 스키마는 단단하게 여물지 않은 상태이기에, 과거의 상처를 잘 추스르고 자신의 마음을 다독여줄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스키마는 언덕 위에서 굴리는 눈덩이와 같아요. 처음에는 그리 단단하지 않지만, 시간을 거듭할수록 그 부피는 점차 커져갈지도 모릅니다. 아직 그 크기가 더 커지기 전, 그리고 더 단단해지기 전이라면 좀 더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고, 긍정적인 시각을 덧입힐 시간은 충분합니다.
자신의 삶, 또 나 자신을 탓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환경을 만들어낸 건 내가 아닙니다. 또, 지금은 환경을 이겨내거나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질 나이가 아니니까요. 분명한 건 이 시간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조금만 낼 수 있다면, 이 삶에 새롭고도 긍정적인 경험들을 할 수 있다면, 삶의 방향은 다르게 흐를 수 있습니다.
우울감과 여러 충동에는 정신과의 약물 치료도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가능하면 이러한 부분들을 아우를 수 있는 심층적인 상담을 함께 진행하는 것이 도움이 될 테지요. 부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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