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경험자의 마음 관리 – 디스트레스란 무엇인가?
의학박사 이광민의 '슬기롭게 암과 동행하는 방법' (6)
[정신의학신문 : 마인드랩 공간 정신과, 이광민 의학박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암 환자들이라면 누구나 정서적으로 심리적으로 다양한 과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 관해 많은 연구를 하신 분이 정신의학자로 호스피스 진료를 의료의 영역에서 발전시킨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입니다. 『인생 수업(원제: Life lessons)』이라는 유명한 책을 쓴 분인데, 주된 진료와 연구 영역이 미국에서 임종을 앞둔 분들을 도와드리는 역할이었어요.
퀴블러 로스에 따르면 죽음 또는 죽을 만큼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여 나가는 과정이 다섯 단계라고 합니다.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 이렇게 다섯 단계입니다. 슬픔의 다섯 단계라고도 하죠.
암 진단을 받자마자 첫 번째로 느끼는 감정은 부정과 관련된 겁니다. “혹시 검사가 잘못된 게 아닐까?”, “좀 더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면 결과가 지금과 달리 정상 혹은 암보다 훨씬 낮은 단계의 병이 아닐까?”라면서 본인에게 닥친 힘든 상황이 사실이 아닐 거라고 부정하는 단계입니다.
그다음에는 “아, 이제 내가 어쩔 수 없이 이 힘든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하는구나.” 하고 마지못해 인정하기는 하지만, “하필이면 왜 내가 이런 힘든 일은 당해야 돼?”라고 반문하면서 짜증이 나고 화가 치미는 단계가 이어집니다.
세 번째 단계는 협상입니다. 종교가 있는 분들은 이해가 빠를 겁니다. “내가 앞으로 조금 더 착하게 살 테니 이 병에서 완벽하게 치유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이런 식으로 절대자나 신을 향해 애절하게 읍소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느끼게 되면 자연스럽게 기분이 우울해지면서 가라앉는 거죠. 견딜 수 없이 침체되는 시기입니다. 그 과정을 넘어가게 되면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는 수용 단계로 들어갑니다.
이 다섯 가지 단계를 순서대로 하나하나 넘어가는 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중간에 건너뛰면서 넘어가기도 하고, 앞에서 뒤로 돌아가기도 하며, 두루 섞여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암 환자들의 정신건강에 있어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부분이 디스트레스입니다. 디스트레스(distress)란 원래 ‘심리적 고통이 함께하는 스트레스’라는 말이지만, 최근에는 암환자의 정신적 고통을 의미하는 말로 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암을 진단받고 나서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정서적인 어려움을 통칭하는 단어입니다.
초반에는 생존과 관련된 부분이 가장 컸습니다. “내가 과연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게 제일 우선되는 부분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암을 관리해 나가는 과정이 이전하고 달라져서 암 치료 중이라 하더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여러 가치나 의미가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바이버십(survivorship)’이 강조되는 거죠.
대개 생존력이라고 번역하지만, 저는 생활력으로 번역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암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생활할 수 있는 능력이나 권리를 뜻합니다. 암을 경험해 가는 과정에서 내 삶의 질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나아가 삶의 질을 더 높이려고 노력하는 그런 것들이 치료 초반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암 진단 시기부터 디스트레스를 관리해 나가면 암 진단 후에도 삶의 질은 나아질 수 있습니다. 암 환자의 정신건강을 바라보는 의사들 입장에서 디스트레스를 많이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디스트레스 관리는 단순히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 내가 정서적으로 안정을 취하기 위해서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생물학적으로 도움을 준다는 연구 결과들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정신내분비학(Psychoendocrinology)이라는 학문 명칭이 있습니다. 각각을 분리해서 보자면 정신의학(Psycho), 내분비의학(Endo), 신경의학(Neuro), 면역의학(Immunology)이 다 연계되어 있는 학문입니다. 우리 마음과 신체 그리고 몸 안에 있는 여러 호르몬 면역체계들이 정신건강과 연계되어 하나의 일체화된 어떤 구조로 돌아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몸 상태가 나빠지면 당연히 정신적으로도 어려움을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몸과 마음은 나눠지는 게 아니니까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모든 사람이 쉽게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반대도 있습니다. 즉 우리가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우리의 면역체계나 호르몬과 같은 영역에 있어서도 부정적인 영향을 줘서 암을 관리하는 데 있어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정신적인 부분에서의 여러 가지 디스트레스를 잘 관리하는 것이 단순하게 내 마음만 편하자고 하는 게 아니라 나의 내분비적인 호르몬과 나의 신경계적인 여러 가지 증상 그리고 나의 면역체계를 긍정적으로 바꿔주는 데에도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암을 경험하면서 느끼는 나의 우울함을 잘 관리한 분들, 나의 불안함을 잘 관리한 분들, 나의 수면 상태를 잘 관리한 분들이 암을 치료하고 생존에 이르는 데 더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냈다는 게 실제 연구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암 병원에서 일반적으로 암 치료를 할 때 디스트레스 관리를 반드시 포함시키도록 하고 있고, 정신과가 아닌 일반종양학 내에 정신건강 전문가가 포함되어 디스트레스 관리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삶의 질과 관련된 부분을 넘어서서 암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도 그리고 환자들이 암을 받아들이고 관리해 나가는 데 있어서도 디스트레스 관리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디스트레스 관리는 마음의 문제를 넘어서서 신체의 안정을 찾아가는 데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암을 치료하는 과정에서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암을 일정 부분 치료한 뒤나 치료가 다 끝난 다음 그리고 암의 재발을 막는 데 있어서도 디스트레스 관리가 중요합니다. 진단 때부터 관리가 필요하듯 완치 후에도 동일한 관리가 필요합니다.
※ ‘고잉 온 캠페인’은 대한암협회에서 암 경험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고 사회 복귀를 지원하기 위해 기획된 프로그램입니다.
그중 ‘고잉 온 토크’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광민 박사와 암 경험자가 만나 일상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을 공유하면서 현실적이고 긍정적인 대처법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암과 관련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온라인 소통 채널입니다. 영상 내용을 정리해 연재합니다.
※ ‘고잉 온 토크’ 강의 직접 듣기 (클릭하면 영상으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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