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이 알파고에게 무너진 이유 - 타이젬바둑 4단의 정신과 의사가 본 이세돌의 심리

2016-03-11     배문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 tygem

 

이세돌 9단(이하 이세돌)이 인공지능 알파고에게 2연패를 당했다. 현재의 알파고는 사람이 이길 수 없는 바둑의 신의 영역에 도달한 인공지능이라고 볼 수 있을까.

 

361칸의 바둑판에서 진행되는 바둑은 대략 150~250수 정도의 수순으로 마무리되며, 한 사람당 100수 내외로 두게 된다. 바둑의 신이 있다면, 그가 둔 모든 수들은 각 상황에서 '최선의 수'일 것이다. 그렇기에 바둑은 '최선의 수'가 아닌 수(나쁜 수 또는 실수)를 적게 두는 사람이 승리한다.

 

알파고가 강한 실력을 보여준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나쁜 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1경기와 2경기 모두 중반에 이세돌이 조금이나마 유리하던 시점이 있었다. 그런데 두 경기 모두 중후반에 이세돌의 큰 실수가 나왔다. 해설가 백대현 9단은 '이세돌이 이렇게 긴장하고 초조해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고 할 정도로, 이세돌은 확실히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을 보였다. 평소 이세돌의 바둑을 관전해 본 사람들 역시 그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세돌이 후반에 왜 이렇게 흔들렸을까. 왜 이렇게 큰 실수를 했을까. 왜 이렇게 불안해 했을까.

 

바둑에서 경우의 수는 361 ! 로 10의 170제곱이라고 한다. 바둑 프로기사 역시 그것을 다 계산하지는 못 한다. 사람이 바둑을 두는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면, 사람은 특정 상황에서 둘 수 있는 모든 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직관)'을 통해 순간적으로 '최선의 수'의 후보가 될만한 몇 가지 수를 떠올린다. 그리고 각 수들에 대해 상대방이 둘 반응을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내가 두고 싶은 수가 3가지 있고, 그 수에 대해 상대방이 반응할 수가 2가지씩 있고, 또 그 상대방의 수에 대해 내가 반응하는 수가 2가지라고 하면, 세 번째 수까지 읽기 위해서는 3*2*2=12 12가지 이미지를 빠르게 그려보면 된다. 프로기사들이 10-20수를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중간중간에 상대방과 자신이 반응하는 수가 1가지 밖에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그런 수순을 '외길' 수순이라고 부른다).

 

어떤 상황에서 빠른 시간 안에 몇 가지 수를 떠올리는 '감각'은, 바둑을 배우면서 흑돌과 백돌이 만들어내는 여러 형태들에서 최선의 수를 익히고 이것이 '시각적 기억(visual memory)'으로 입력되면서 점차 형성된다. 일일이 놓아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런 형태일 때는 여기가 좋은 수'라는 '감각'이 생기게 된다. 지금까지 인공지능이 사람을 이기지 못 했던 것은, 순간적으로 직관을 통해 둘 곳을 추려내는 사람과 달리 수치적으로 접근하는 인공지능은 둘 곳을 추리는 과정이 쉽지 않았고, 그렇기에 연산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현재의 발전된 컴퓨터로도 제한 시간 내에 사람만큼 '최선의 수'를 잘 찾아내지 못 했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프로기사들이 제한시간 없이 시합을 한다면, 가능할 만한 모든 수를 읽어나가면서 -한 판을 몇 달 동안 둘지도 모른다- 거의 바둑의 신에 가깝게 최선의 수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제한시간은 존재하며, 제한시간이 3시간씩 주어진다 하여도, 최정상급 프로기사들조차 3시간 안에 모든 수읽기를 할 수는 없다. 알파고 역시 몬테카를로 등의 기법을 통해 더욱 빠르고 효율적으로 수를 찾지만, 제한시간이 있는 한 '모든 수를 읽을 수는 없다'는 점은 인간과 동일하기에, '최선의 수'가 아닌 수를 둘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결국 사람간의 대결이든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이든, 제한시간 내에 더 최선에 가까운 수들을 빠르게 추려 선택하는 쪽 - 나쁜 수나 실수가 적은 쪽 - 이 승리하는 것이다.

 

이세돌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초등학교 대회를 휩쓸던 천재형 기사이다. 손석희와의 인터뷰에서 '바둑을 진 스트레스는 바둑을 이겨서 푼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승부욕이 아주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반 포석은 약하지만 특히 수읽기가 매우 강해서, 중후반에서는 실수가 많지 않은 기사이다.

 

운동선수가 30살이 넘으면 신체능력이 조금씩 떨어지고, 프로게이머들도 25세 전후로 실력이 저하되듯이, 바둑 역시 30~35세 경 실력이 하락하기 시작한다. 바둑은 신체능력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종목 같지만, 인지기능을 담당하는 뇌 역시도 노화되어가는 신체의 일부이기에, 작업 기억(working memory), 집중력(attention) 등의 인지기능이 저하되면서 실수가 많아지는 것으로 보인다. 패배를 모르던 절대강자 이창호 9단도 2004년 29세의 나이에 최철한 9단에게 지기 시작하면서 신의 경지에서 조금씩 내려오기 시작했다. 현재 33세의 이세돌 역시 박정환 9단에게 한국랭킹 1위를 넘겨준지 2년여가 지났지만, 여전히 그는 한국 랭킹 top 3에 드는 최정상급 기사 아닌가! 그는 왜 평소와 다르게 자신의 주특기인 중후반에 큰 실수를 하며 무너졌을까.

 

최근 인공지능의 실력이 아무리 급성장했다고 하여도, 경기 전 대부분의 프로기사들은 '당연히 이세돌이 5:0으로 이긴다'고 생각했다. 이세돌은 인류 대표로 선택된 것은 기분이 좋고 상금도 많이 받을 수 있어서 좋았겠지만, '이겨야 본전이고, 한 판이라도 지면 쪽팔리는' 마음으로 임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첫 경기를 두어보니, 알파고가 몇 번 작은 실수도 있었으나 대부분 '최선의 수'를 두는 상당한 바둑 수준이었고, 중반에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때부터 이세돌은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다. 승부욕 강한 성격, 언론의 엄청난 관심, 동료 프로기사들의 기대, 인류 대표로서의 책임감 등은 그를 극심한 불안으로 몰고 갔다.

 

흔히 '무대 울렁증'이라고 불리는 사회 불안 증상 역시 '여러 사람들 앞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에 대한 불안 증상이며 핵심 감정은 수치심이다. 나와 비슷한 실력 또는 나보다 잘 둔다고 인정하는 사람과 둘 때에는 내가 불리해도 수치심이나 불안을 느끼지는 않는다. 내가 지는 건 있을 수 있으니까. 반대로 이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수록, 또한 승부욕이 강할수록, '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불안 증상은 극대화되고, 이러한 불안 증상은 인지 능력을 현저하게 떨어뜨렸을 것이다.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하는 면접에서 당황했을 때 머리 속이 새하얘지는 것 역시 같은 현상이다.

 

축구의 승부차기에서도 선축이 유리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먼저 차는 사람이 골을 넣고 나면, 나중에 차는 사람은 '꼭 넣어야 한다'라는 부담감을 가지기 때문이다. 심리적인 영향이 적은 육상 같은 종목도 있지만, 야구나 골프 같이 정교한 자세가 중요한 운동종목 역시 심리적인 영향이 크고, 실수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양궁이나 체조 등의 운동종목은 말할 것도 없다. '최정상급 스포츠 선수들은 '잘 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다루어야 하고, 이를 위해 '스포츠 심리학' 전문가들이 도움을 주기도 한다.

 

만약 다른 최정상급 프로기사가 알파고에게 진 후에 이세돌이 경기를 했다면 이세돌이 이렇게 실수를 했을까. 1경기와 2경기를 모두 지면서 오히려 '이세돌이 알파고를 한 판이라도 이길 수 있을까' 라는 여론으로 바뀐 상태에서, 남은 세 경기에서는 지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내려놓은 이세돌이 앞의 두 경기보다 좋은 내용의 경기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