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Q) 안녕하세요, 올해 수능을 치르는 고3 학생입니다. 제가 가진 완벽주의 때문에 너무 힘이 들어요.

저희 친척들은 다들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의사. 판사, 높은 자리에 있는 공무원, 대학교수 등등 대단한 직업들이죠. 제 위의 언니 오빠들도 공부를 잘해 명문대에 들어갔고요.

 

부모님도 당연히 욕심이 났을 거예요. 저는 어릴 때부터 성적에 대한 압박을 엄청나게 받았습니다.

성적이 좋지 않을 때 큰소리로 혼내거나 때리진 않으셨지만, 성적표를 받아 보시곤 절 쳐다보는 싸늘한 눈빛은 그보다 더한 공포였어요.

정말 열심히 공부에 매달리고, 다른 아이들 성적을 눈치 보는 생활이 계속됐어요.

성적은 잘 나왔지만 반에서 1등을 해도 나 자신에 대한 칭찬이나 만족보다는 ‘성적이 떨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염려가 더 컸어요.

그러니 학교생활도 삭막하고 재미가 없었고요. 은근히 아이들이 절 따돌리는 것 같아요.

 

공부는 정말 자신 있었어요.

초등학교 때 시험만 보면 전교 1등을 거머쥐는 저를 보고 친척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친구들은 저에게 '천재'라는 칭호를 붙여주었고 학교의 수업은 저에겐 외운 것을 완벽하게 말할 수 있느냐를 테스트하는 수준이었던 만큼 저는 암기의 천재였어요.

성적과 관련된 모든 것들, 그러니까 노래, 피아노, 춤, 그림, 발표, 글쓰기, 토론, 심지어 체육도 열심히 하려 했고, 안되면 될 때까지 자신을 몰아붙였어요.

하지만 그 뒤에 아무도 몰라주는 외로움과 눈물을 삼키면서 공부해야 했던 제 모습을 아무도 몰라줬죠.

 

사진_픽셀

 

고등학교에 올라오고, 이과를 가게 되면서 문제가 생겼어요.

처음 접하는 과목들이 너무 어렵고 성적이 잘 나오지 않기 시작하면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더라고요.

성적도 그럭저럭 나오긴 했는데, 도저히 만족이 되지 않았어요.

아니, 만족이란 단어가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성적이 잘 나오지 않으니 자꾸 게임, 만화 같은 것들에 빠지게 되고, 공부는 점차 쳐다보기도 싫더라고요.

적어도 공부에 있어서는 완벽한 사람이었는데, 성적은 떨어지고, 부모님이 절 꾸중하시는 것 하나하나가 소름 끼치게 무섭고 불안해요.

지금 제 곁에는 아무도 없는 느낌이에요.

절 지탱하던 것들이 다 무너진 것 같아요.

이제는 잠도 오지 않고, 밤새 만화를 보다가 쓰러지듯이 겨우 잠이 들어요.

학교 수업시간에는 무기력하게 잠만 자고 있어요.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가, 간신히 빠져나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진_픽셀

 

A) 사연을 여러 번 읽어 봤습니다.

제가 다 이해는 못 하겠지만, 한 문장 한 문장에 질문자님의 절박한 마음이 묻어나는 것 같아 저도 참 가슴이 아픕니다.

 

좋은 성적, 말 잘 듣는 착한 아이, 명문 대학교… 우리나라의 교육 목표를 상징하는 단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질문자님처럼 상상도 못할 압박을 받으며 공부하고 있는 청소년들이 있지요.

적어주신 성장 과정, 질문자님을 향한 부모님의 태도 면면을 보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자신을 스스로 옭아매었을까 하는 생각에 참 안타깝기만 합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먼저 의학적인 부분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어요.

본인도 짐작하시겠지만, 현재의 마음 상태를 볼 때 우울증의 가능성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필요할 것 같아요.

‘완벽’을 위해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는 이들의 경우, 자동차의 연료가 고갈되듯 에너지가 소진되는 시점이 언젠가는 옵니다.

열심히 달리다 추진력이 떨어진 자동차처럼 잠시 멈추어 설 때가 분명히 오는 거죠.

 

그때는 공허감이 찾아오고, 더 달려 나가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책, 그리고 우울감이 자신을 덮쳐오기 시작합니다.

현재 추진력을 잃고 힘들어하는 이유가 우울증의 늪에 빠졌기 때문은 아닌지, 그래서 우울감, 외로움, 무기력 같은 부정적인 경험들과 극단적인 생각이 함께 드는 것은 아닌지 의학적인 정확한 평가도 꼭 필요할 것 같아요.

또 필요하다면, 상담치료나 약물치료 같은 적절한 치료적 도움을 받는 것도 좋겠습니다.

 

사진_픽셀

 

한창 성장하는 청소년 시기에는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기 힘든 경우가 많아요. 부모님과 이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인간이 가진 완벽주의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나약함을 가리기 위한 목적이었을지도 몰라요.

질문자님이 그간 쓰고 있었던 ‘완벽주의자의 가면’ 뒤에는,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나약하고 외로운 어린아이가 있어요.

겉으로 보이는 완벽주의를 걷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간 자신을 이해해주는 이 없이 고독을 견뎌야 했던 마음 안의 아이를 달래어주고, 공감해 나가는 과정 또한 매우 중요한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향한 위로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습니다.

 

긴 인생을 생각하면, 지금의 고통은 잠시 흔들리는 과정이라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문제로 힘들어하던 비슷한 나이대의 친구들이, 충분한 도움 덕에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하는 경우도 참 많거든요.

조바심으로 목표와 성과에만 매달리지 마시고, 오히려 최근의 힘든 시기를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조금은 여유를 가지셨으면 좋겠네요.

이를 발판으로 더 새로운 삶의 방향이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만약 치료를 받게 된다면, 부모님도 함께 치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양가감정을 잘 풀어낼 수 있도록요.

 

강하게만 조여진 바이올린의 줄은 결국 끊어집니다.

그렇다고 느슨하게만 해서는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의 소리를 낼 수 없겠지요.

그러니 완벽주의를 극복하는 방향은 조율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진_픽사베이

 

물론 지금처럼 스트레스가 꽉 차있는 상황에선 혼자 힘으로 해내기가 쉽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현재 학업과 대학 진학을 목표로 두고 있다면 더더욱 완벽주의를 내려놓기는 어렵겠죠.

하지만, 분명 질문자님의 생활에 조율은 분명 필요합니다.

 

해야 할 목표치를 구체화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큰 덩어리의 목표를 잡는 것보다는 작은 덩어리로 쪼개어 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중간고사 범위 완벽하게 외우기’ 같은 목표보다는, 각 과목별로 나누어 현실적인 목표를 정하고, 공부 스케줄을 조금씩 쪼개어 분산시키는 거죠.

모든 목표를 100% 달성하려 하기보다는, 조금은 목표치의 범위를 넓게 가지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머릿속으로 생각하기보다 직접 적어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또 한 가지, 어느 정도의 성과를 달성한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스스로를 위한 선물(보상)도 꼭 필요해요.

물질적인 것이든, 휴식과 같은 무형의 것이든 간에요.

작은 것들을 이루어 나가는 기쁨은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줘요.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작은 선물이 뭘까,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네요.

 

현재까지의 주변 환경으로 인해 삶에서 완벽주의를 ‘학습’해 왔다면, 반대로 조금씩 자신의 삶을 잘 조율해 가는 방법도 충분히 배워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질문자님의 고민이 조금이나마 덜어졌기를 바랍니다. 멀리서 마음속으로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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