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 픽사베이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갑자기 투덜거리며 짜증을 내고 별 이유도 없이 눈물을 흘리거나, 느닷없이 불안해하는 애인의 히스테릭한 모습에 우물쭈물하는 남자친구의 어리숙한 모습은 공감과 웃음의 소재로 단골처럼 등장한다. 물론 대부분은 그들이, 아니 우리가 눈치 없게도 애인의 기분을 망친 정답을 알아내지 못하는 탓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들 ‘감정’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게 매번 정답을 찾아내기가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느낌’, ‘정서’의 감각은 무척이나 오묘해서 단순히 ‘바늘-따가움’, ‘얼음-차가움’ 같은 ‘자극-반응’의 회로에 따른 구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만큼 정신과 영역에서는 정말 나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갑자기 퍼져 나가기 시작하는 불안감이나 공포, 우울감에 힘들어하는 환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공황장애 환자들의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하게 시작되는 폭발적인 불안과 공포 반응은, 그 명확한 원인을 (환자도-의사도) 알기가 무척 힘들다.

이렇게 원인을 알 수 없는 감정과 불안들은 무척 다양한 시각에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 중 심리학적으로는 ‘외현기억’과 ‘암묵기억’이라는 기억의 독특한 구조로 그 원인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외현과 암묵이라는 기억의 이중 구조 말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라는 영화에는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새미’의 이야기가 삽화처럼 소개된다. 기억이 1분 이상 지속되지 못하는 새미에게, 손으로 잡으면 전기충격이 가해지는 물체를 여러 차례 반복하여 잡아보라고 하는 내용의 실험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영화에서는 보험금 수령 여부를 판별하기 위한 실험이었지만, 사실 이 장면에는 심리학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실험이 숨어있다. 그것은 바로 기억의 구조를 ‘외현기억’과 ‘암묵기억’으로 나누게 된 계기가 되었던 실험이다.

 

1911년 프랑스의 내과의사인 에두아르 클라팔드(Clapared, E.)는, 뇌손상으로 기억이 1-2분 정도 밖에 유지가 안 되는 여자환자를 치료했었다. 그녀는 의사와 악수를 해도 방을 나가 1-2분만 지나면 곧 그 의사를 보았던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의사가 손에 압정을 숨겨 악수를 하며 그녀의 손바닥을 찌르자, 그 다음 방을 나갔다 들어온 뒤에 그녀는 의사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손을 움찔하며 악수를 피했다.

의사를 만나 인사를 하고 악수를 했다는 기억. 우리가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이러한 의식적 기억이 바로 ‘외현기억’이다. 그리고 외현기억처럼 머릿속으로 떠올리거나 회상할 수는 없지만, 통증을 기억하고 회피반응을 유도하는 무의식적 기억이 바로 ‘암묵기억’이다. 뇌손상을 입은 클라팔드의 환자가 외현기억은 손상되었지만 암묵기억은 유지되었던 것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두 종류의 기억은 뇌의 서로 다른 회로에 의해 유지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성질을 갖게 된다. 그 중 중요한 것은, 우리가 1주일 전 들었던 라디오의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하듯 외현기억은 쉽게 변질되고 망각되는 것과 달리, 암묵기억은 본능적 반응(회피, 긴장 등)에 조건화되며 아주 오랜 시간 지속되고 심지어 강화된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강한 충격이나 트라우마는 공포반응의 조건화를 일으킨다. 공포 조건화는 특정한 상황, 대상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와 같은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외현, 암묵기억을 형성한다. 그렇지만 외현기억의 형성능력이 불완전한 어린 시절에 구축된 기억은, 오랜 시간이 지나며 약화되거나 망각되어 사라진다. 그렇지만 그 대상에 조건화된 암묵기억은 홀로 남아 사라진 외현기억에 불을 붙인다. 과거에 경험했으나 잊어버린, 그렇지만 본능의 기억이 남아 불러일으키는 불안하고 우울한 감정들에 영문도 모르고 걱정하게 되는 것이다.

사라져버린 기억 위의 갈 곳 잃은 감정들은 때로, 새로운 상황들에 조건화 되며 또 다른 불안장애로 발전하기도 한다. 불안한 감정이 원인을 찾아, 두근거리는 심장이나 식은땀에 조건화되면, 자율신경 반응 자체로 공포반응이 더욱 악화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져 공황장애로 발전 할 수 있다. 혹은 흔히 접할 수 있는 무서운 환경들-높은 곳이라던지 거미, 폐쇄공간 등의 상황과 접붙어지면 고소공포증, 폐쇄공포증 등의 공포증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아주 아주 복잡한 감정에 대한 무척 단편적이고 단순화된 설명이긴 하다. 그렇지만 당신이 두려워하는 갈 곳 잃은 감정들, 영문 모를 감정들의 정체는 생각보다 깊은 뿌리와 역사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나의 감정을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나의 감정은 나의 소유물, 나의 부속물이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과 마음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나와 함께 자라온 낯설지만 오랜 친구이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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