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복운전을 통해 바라본 분노

YTN 화면 캡처

화를 못 참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일까? 최근들어 보복운전에 대한 뉴스를 자주 접하게 된다. 말 그대로 내 앞에 끼어들거나 속도를 더디게 내는 등의 자동차에 대해서 복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내면에는 분노라는 감정이 자리잡고 있다. 놀라운 것은 보복운전을 하는 이들이 평소에 건실하게 직장에 다니고 적절한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꽤 많다는 점이다. 24시간 내내 분노에 휩싸여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복을 감행하게 되는 그 순간에 분노가 올라오고 이것을 여과하지 않고 방출하는 것 뿐이다. 왜 유독 운전할 때 정상으로 보이던 사람들이 난폭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 걸까?

아마 그 배경에는 익명성이 작용하는 것 같다. 행위의 주체는 운전자이지만, 행위의 현상은 오직 자동차를 통해서만 구현된다. 쉬운 말로, 사람은 안 보이고 자동차만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내 앞에 갑자기 끼어드는 자동차를 볼 때,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면 그것은 운전자가 아니라 우선은 자동차 그 자체에 향하게 된다. 그래서 도로 위의 분노는 사실 인간 대 인간 사이의 감정과는 애초에 차원이 다른 문제에 속한다. 내가 이 순간 자동차에 대하여 분노를 느낀다면, 여기에 예절이나 상식과 같은 사회적 통념이 수반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분노는 여과될 필요가 없고 즉각적이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그 해당 자동차를 향해 표출된다. 이 때도 보복행위 그 자체는 오직 나의 자동차를 통해서만 구현된다. 내가 행위의 주체이지만, 나라는 사람은 감쪽같이 익명성 안에 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나의 분노는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에 향하고 있기 때문에 폭력성이 상당 부분 합리화되는 것이다. 반대로, 도로 위 무법자라 하더라도 평소에 인간 대 인간으로서 누군가를 대면할 때에는 즉, 나의 모든 것이 노출될 때에는 무자비하게 분노를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진 픽사베이

그런데 분노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상황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내 사회적 체면이고, 가족이고, 도덕이고 여부를 떠나서 당장의 분노를 어찌할 수 없어 폭발시키는 경우이다. 위에 말한 익명성에 안주한 분노와는 다르다. 더 파괴적이고 극심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살인이나 방화가 그 행위의 극단에 있을 것 같다. 이 분노는 가리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도 피해를 끼칠 수 있다. 분노조절에 문제가 있으면 주변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미국에서라면 총기 난사사건의 주범들이 내면에 강렬한 분노를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분노의 두려운 측면 중 하나는 그것이 꼭 즉각적이고 충동적으로 표출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오랜 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단단하고 넓게 쌓아온 분노는 당장에 봐서는 눈치채기 어려울 수도 있으나 사실 이것이 더 파괴적이고 치명적이며 이 사회를 경악하게 만든다. 문제는 꼭 총기난사의 범인들 뿐 아니라 일반적인 대다수 사람들이 점차 이런 형태의 분노를 내면에 지니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에 닿아 있다. 어릴 때부터 혹독한 입시 경쟁에 휘말리고, 사회에 나와선 취업과 실업 사이에서 숨죽이고 눈치 보며, 직장과 가족 사이의 불균형에도 참고 살아가다, 자식들과 생이별하고 묵묵히 외로운 여생을 견뎌내는 우리들의 자화상에는 ‘감정의 억압’이 꼬리말처럼 따라다니는 것 같다.

나의 당장의 감정들을 참고 모른 척 해야 이 사회에 적응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이미 사회구조가 바뀌어버린 지 오래이다. 억압은 분노를 만드는 핵심 정신작용이며, 더 이상 억압할 수 없을 때쯤 나의 밖으로 터져 나오게 된다. 자살이나 살인처럼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이 시대가 분노의 시대라면, 다른 말로 이 시대는 억압의 시대이기도 하다.

따라서 억압된 감정을 미연에 풀어내는 것이 중요할텐데 그럴 기회가 마땅치 않다. 만약 당신이 단 한 사람이라도 당신의 억압된 불편한 감정들을 여과 없이 언어로써 표현해도 모두 수용해줄 누군가를 곁에 두고 있다면 당신은 매우 축복받은 사람일 것이다.

김일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남차병원 교수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한양대학교 구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 조교수
한양대학교 뇌유전체의학(자폐) 석사
KAIST 뇌유전체의학(자폐, 조현병)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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