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대한노인정신의학회 홍나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치료과정에서 ‘라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생소하게 들리는 ‘라포(rapport)’란 단어는 영어사전 상의 의미는 ‘관계; 협조; 일치’를 뜻한다.

의학에서는 환자와 의사 사이의 치료적 관계를 뜻하며, 친밀감과 신뢰감을 느낄 수 있는 관계를 의미한다.

정신건강의학과에 막 입문하는 전공의들에게도 망상과 환각이 가득한 환자들과 ‘라포’를 맺는 것이 처음 주어지는 지상 과제이다.

의사가 독을 주어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환자들과 ‘라포’를 맺는 것은 정신건강의학에 입문하는 초심자들에게 결코 도달하기 쉽지 않은 과제이다.

 

사진_픽사베이

 

나는 정신건강의학과 중 노인정신의학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로, 많은 치매 어르신들을 치료하고 있다.

노인정신의학 전문의로서 흔히 듣는 질문 중의 하나는 "치매 환자와는 관계를 맺는 것이 잘 안 되니 보호자만 주로 보겠어요?"다.

실제로 노인 환자들은 병원에 오시는 것도 어렵기도 하고, 특히 치매 어르신들의 경우는 긴 면담을 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또, 보호자분들은 환자 돌봄과 관련하여 궁금하신 것도 많고 상담하시고 싶은 내용도 많은 것도 사실이다.

치매 환자 치료에 있어서 보호자와의 라포는 환자와의 라포만큼이나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치매 환자라고 해서 주치의와 라포가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물론 치매가 깊어지게 되면 주치의는 고사하고 평생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시던 자식들도 못 알아보시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전까지 주치의에게 수도 없이 눈물 날 만큼 감동적인 순간을 주시는 분들이 치매 어르신들이다.

수개월 만에 만나게 된 상황에서도 몇 년 전 주치의가 임신했던 것을 기억하고 애들은 잘 크고 있는지 챙겨 주시기도 하고, 집에서 드시던 간식을 ‘우리 선생님 줘야 한다’며 주머니에 꼬옥 넣어가지고 오셔서 몰래 건네주시며 ‘간호사 주지 말고 꼭 선생님이 먹어요, 비싼 거야’ 라며 속삭이고 가시기도 하고, 오늘 주황색 블라우스가 예뻐서 훨씬 젊어 보인다고 앞으로 지난 번처럼 거무죽죽한 거 입지 말고 밝은 거 입으라고 패션 정보를 주고 가시기도 한다.

가끔 이런 모습에 가족분들도 놀라시기도 한다. 당연히 기억 못 하실 거라고 생각하고 ‘병원 가요’하고 별 설명 없이 모시고 왔는데 주치의까지 챙기시는 모습에 신기해하시기도 한다.

얼마 남지 않은 그 어르신들의 머리 속 어딘가에 내가 남아 있다는 것은 정말 감동적인 일이다.

 

사진_픽사베이

 

치매 어르신이라고 아무것도 못 하시는 것이 아니듯 다른 사람들, 특히 당신을 돌보는 사람들과 교감을 못 하시는 것은 절대 아니다.

어쩔 때는 머리로는 누군지 잘 모르시면서 ‘아주머니는 참 좋은 사람이에요’하고 그냥 좋은 감정만 말씀하시고 가시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가 내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경험이다.

'정말 나에 대한 아무 편견 없이 그냥 내가 좋다는 것 아닌가?'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치매 어르신과 같이 지낸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 이렇게 반짝이는 순간을 느낄 수도 있다.

비록 그 반짝임이 찰나일지라도 우리는 그 반짝임을 놓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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