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Q) 안녕하세요, 저는 2년간 무기력증에 시달리다 우울증은 아닌지 의심이 되어 문의드립니다.

무기력증은 2년 전 학업 스트레스로 시작되었습니다.

그중 1년 동안은 주변인과의 관계에서 큰 스트레스를 경험해 심리상담센터에서 상담을 받았습니다. 주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무기력증이 심하였었고요.

그런데 상담을 통해 주변 관계 정리하는 법이라든가 나만의 선을 지키는 법에 대해서 유익한 조언을 얻어 주변인 문제는 얼추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올해 초에 상담을 종결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계속되는 구체적인 증상은 첫째로 힘과 의욕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밥 때가 되어 배가 고프더라도 밖에 걸어나갈 힘이 없어서 식사를 거르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대중교통으로 1시간 넘게 걸리는 학교와 집을 오갈 힘이 없어서 택시를 숱하게 타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못 일어나는 것은 물론, 수업에 못 가는 일도 더러 있었고요.

 

아무것도 못 하기 일쑤여서 항상 해야 되는 과업들은 마감기한이 닥쳐서야 겨우 밤을 새워서 마무리하는 등 생활이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렇게 밤을 새우고 나면 또 지치고 힘들어서 생활패턴이 망가져버렸습니다.
 

사진_픽사베이


친구를 만나거나, 외출을 한다거나, 운동을 할 힘이 없어서 대부분 휴식은 집에서 누워있으면서 TV를 보는 식으로 취했습니다.

체력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운동을 해야겠다는 마음은 굴뚝같지만 움직일 힘 조차 없어서 운동할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힘과 의욕이 없다 보니 학업에 지장이 생겨 답답합니다.

예전에 해냈던 분량의 작업을 반도 못해냅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데 있어서 효율이 크게 저하되었습니다.

사실 지금이 더 많은 작업을 해내야 하는 상황인데 예전만큼도 되질 않으니 답답할 따름입니다.

앞으로 계속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상황입니다. 또 예전에 가졌던 열정과 의욕이 싹 사라졌습니다.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지만 의욕도, 체력도 다 바닥이 나서 그런지 공부에 대한 목적의식도 희미해져서 공부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딱히 '우울'하고 '슬픈' 느낌은 크게 들지 않습니다.

사실 딱히 기쁘거나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긴 합니다. 만족스럽고 행복한 기분으로 살았던 기억이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너무나 슬프고 비참하고 죽고 싶은 기분은 아니지만 '왜 사나?' 하는 생각을 늘 합니다.

한때 가장 힘들었을 때에는 파국에 치닫는 생각들도 했었는데, 지금은 딱히 그런 생각을 할 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제가 커다란 나무 막대기 같다고 느껴집니다.

 

증상을 말씀드린다고 해놓고 이야기가 장황해졌네요.

그래서 지금 여쭤보고 싶은 것은 이런 식의 증상을 느끼는 상황에서 다시 상담센터를 찾는 게 더 나을지, 아니면 병원을 가서 임상적인 처방을 받는 것이 더 나을지 조언을 부탁드린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우울감이나 슬픔을 느끼진 않지만 이런 증상도 임상치료가 필요한 우울증 증세일 수 있나요?

그리고 심리상담을 통해서 저를 힘들게 하는 기제들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그것들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증상이 계속되는지라 심리치료에만 의존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는 판단이 드는데요, 어떻게 보시는지요?

전문가 선생님의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사진_픽셀

 

A) 안녕하세요. 꽤 오랫동안 고민을 하고 계시군요.

1년 동안이나 상담치료를 받으셨다니, 질문자님께서 스스로 마음에 대해 상당히 깊은 수준으로 성찰하고 노력해오셨을 거라 짐작이 됩니다.

또 그 안에서 나름대로 큰 성과도 얻으실 수 있으셨던 것 같고요. 

 

최근 고민되는 바에 대해서 길고 자세하게 적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 주신 고민의 가장 큰 갈래는 아무래도 '우울감이 딱히 심한 것은 아닌데, 무기력감만 지속되는 상황'에 대한 걱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분명히 예전과 다르고, 기운이 없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의욕도 없는데, 그렇다고 딱히 우울하고 절망스럽고 슬프거나 한 것은 아니니, 이게 과연 우울증인지 고민이 되실 것 같습니다.

 

우울증은 기본적으로 지속되는 '우울감'을 가장 핵심으로 하는 병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울증이 단순히 '우울'한 병인 것만은 아닙니다.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우울증이란 ‘우울한 감정을 핵심으로, 정신운동활력의 저하를 동반하는 병’이겠지요.

 

우울증에 걸린 사람의 뇌에서는 평상시보다 뇌의 신경전달물질 분비와 활성이 현저하게 저하됩니다.

신경전달물질이란 뇌를 이루고 있는 뇌세포 사이사이를 연결하는 물질들인데, 뇌가 활발하게 활동하려면 신경전달물질은 많이 만들어지고 많이 분비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우울증 환자는 바로 이 신경전달물질의 활동이 무척 저하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뇌세포들의 역할 - 생각, 운동, 감정, 신진대사 모든 역할들이 전반적으로 저하될 수밖에 없겠지요.

즉, 우울증은 뇌의 활동량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는 병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울증 환자들은 심각한 우울감, 슬픔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아예 감정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감정불능증(Alexithymia)에 빠지기도 합니다.

즐거움, 슬픔, 놀람, 두려움 등의 모든 감정을 제대로 느끼거나 표현하지 못하게 되고 얼굴 표정도 점점 단순해져 가게 되지요.

질문자님께서 말씀해주신 대로 사람이 '나무토막'처럼 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는 감정불능증이 아니더라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상태-쾌락불감증(Anhedonia)에 빠지게 되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재미있게 하던 것들, 예전에는 나를 즐겁게 해주던 TV 예능쇼나, 운동, 친구들과의 대화 등이 전혀 재미있지 않고 어떠한 즐거움도 주지 못하는 증상이 바로 Anhedonia입니다. 
 

사진_픽사베이


이러한 감정불능증과 쾌락불감증을 주된 증상으로 하는 우울증은 무기력감, 에너지의 저하, 의지의 상실 등과 같은 증상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귀찮고, 다 의미 없어 보이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지지요.

심한 상태의 무기력증은 심지어 우울증의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인 자살사고마저도 저하시킵니다.

죽고 싶은 생각에 골몰할 에너지조차도 부족한 것이지요. 자살을 감행할만한 의욕도 없어지고요.

살아서 뭐하나, 사는 게 귀찮다, 이러느니 그냥 죽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은 구름처럼 떠가지만, 자살해야겠다!라는 결심으로 옮겨갈 만한 정신적, 신체적 에너지가 부족한 것입니다.

이런 증상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이는 우울증은 멜랑콜리아 우울증(Melancholia)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멜랑콜리아 아형의 우울증은 앞서 이야기한 '뇌 활동의 저하'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뇌가 활동을 제대로 못하니 생각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집중력도 떨어지고, 기억력, 사고력, 계산력도 떨어지지요.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몸을 움직일 힘도 부족합니다.

자율신경계의 조절 능력도 떨어져서 체온, 혈압, 맥박의 변화도 나타나지요.

 

그래서 어쩌면 질문자님께서도 이러한 형태의 우울증을 앓고 계신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울감마저 느끼지 못하는 우울증 말이지요.

만약 그러하다면 정신과적 약물치료를 시작해보시는 것이 분명 도움이 될 거라 생각이 됩니다.

항우울제의 기본적인 작용 기전은 앞서 말씀드린 신경전달물질의 활성화입니다.

뇌세포와 뇌세포들 사이사이에 신경전달물질이 더 많이 쌓여서 더 많은 신호가 서로 전달되도록 도와주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우울증의 이러한 신체적인 증상(무기력증, 에너지 저하, 식욕 저하 같은 증상)에는 특히 항우울제의 효과가 더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같은 상황을 더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인지왜곡과 같은 심리적인 증상은 상담치료를 통한 개선과 훈련이 필요하지만, 신체적인 활력과 에너지는 아무래도 약물의 도움이 더 효율적일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니 약물치료에 대해 너무 부담스러워하시거나, 걱정하시지 말고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해보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마비되어버린 질문자님의 뇌에 기름칠을 좀 해본다는 생각으로라도 말이지요.
 

사진_픽사베이


덧붙여, 질문자님께 도움이 될만한 방법으로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동치료적인 방법을 하나 제안드리고자 합니다.

질문자님께서는 이미 1년간의 상담을 통해 질문자님을 힘들게 하는 기제들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그것들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계신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사실 그것만해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한 깨달음을 일궈낸 것만으로도 정말 큰 자산을 얻으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나의 문제를 통찰하고 그것을 고쳐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과 달리, 실제로 진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본격적인 훈련을 하는 것은 조금 다른 형태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한다고 한다면 처음에 필요한 것은 좋은 트레이너를 만나서 올바른 운동 방법과 자세를 익히는 것이겠지요. 심리상담을 받듯이 말입니다.

어떤 자세로 어떻게 운동해야 다치지 않고 원하는 근육을 원하는 만큼 자극하는지를 깨닫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그 자세를 익히고 난 다음에는 반복적으로 그 운동을 해나가는 실질적인 '과제'가 필요합니다.

그 자세를 통해 근육을 키울 수 있도록 힘들어도 부단히 '반복'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즉, 머리로 운동을 배웠다면 이제는 그 운동을 몸이 익히고 습관들이는 단계로 넘어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훈련 중 하나의 일환으로 무기력증-무의욕증이 두드러지는 멜랑콜리아 우울증에 효과적인 행동치료 훈련법 하나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우선은 질문자님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들, 세상 모든 것이 재미없고 귀찮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나를 기쁘고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것들을 리스트를 작성해보십시오. 아주 사소한 것부터 아주 거창한 것까지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 듣기, 따뜻한 차 한잔 마시기, 맛있는 디저트를 먹기 같은 것에서부터 바다로 여행 가기, 해외여행 가기, 콘서트나 공연에 가기 등처럼 가능한 많은 목록을 한번 쭉 적어보십시오. 시간을 충분히 들여서 적으셔도 좋습니다.

어쩌면 하루가 넘게, 일주일 동안 리스트를 작성해볼 수도 있겠지요. 가능한 많이, 적어도 스무 개 이상의 리스트를 만들어보는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는 각 항목마다 난이도 점수를 한 번 줘보세요.

내가 지금 이걸 하기에는 얼마나 힘들지, 가장 쉬운 것이 1점, 가장 어려운 것이 5점이라고 정해놓고 하나하나 점수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이제 매일매일 그 리스트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해보는 것입니다.

하기 싫고 귀찮아도, 재미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하니 재미가 없어도 과제처럼 하는 거지요. 운동을 하기 싫어도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하루하루 해낸 목록들의 점수를 합쳐서 그날 하루의 총점을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의 목표 점수, 다음 주의 목표 점수, 이번 달의 목표 점수를 정해서 조금씩 그 점수를 높여가는 방식으로 '즐거움을 훈련'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새 조금씩 침대와 소파에만 매여있던 일상이 조금씩 변화하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지 모릅니다.

먹먹하게 마비되었던 뇌도 그러면 조금씩 다시 움직이려 할 테고요.

뇌가 멎어서 몸이 멈춰버렸다면, 이제는 아래에서 위로-몸을 움직여서 뇌를 깨우는 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우울의 늪에서 벗어나고 나무토막에서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말이지요.

 

너무 많은 내용을 말씀드리고자 하다 보니 글이 너무 길어져서 장황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질문자님에게 건투를 빌겠습니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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