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이번에도 안 될 것 같아요. 내가 알아요.”

 

A는 심리치료를 하나의 퀘스트(quest. 게임 속 사용자가 수행해야 하는 임무)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치료가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이제부터 함께 살펴봅시다."라는 말을 건네자, 이번에는 "열심히 해도 별다를 게 없으면, 그땐 어떻게 되나요."한다.

 

많은 경우 내담자는 치료에 대해 양가적(ambivalent)인 감정을 보인다.

너무나 나아지고 싶지만 '실제로 증상이 나아져' 그간 나를 보살피던 사람들이 떠날까 싶어 두려워하고, 혹은 나아져도 극적으로 변하는 상황이 없을 것 같아 결국 지금의 상태에 머무르기를 선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A는 우울과 불안이 나아지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치료의 결과에 대한 불안으로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보였다.

말을 고를 때에도 조심스러워하며 세심한 배려가 몸에 배어있었고, '민폐 끼치기 싫다'는 말을 자주 하였다.

상담치료 후 자신이 큰 변화를 보여주지 못하여 임상가가 자신에게 실망할까봐 걱정이라는 말을 할 때에도 '민폐'라 표현했다.

 

A는 불안에 중독된 것 같았다.

명료하게 자신의 일상과 간헐적인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다가도, '불행과 재수 없음'으로 이어진 자기 삶을 잊고 있었단 사실에 당황해하며 굳이 다시 자신을 쿡쿡 쑤셔대어 엉금엉금 불안으로 걸어 들어가 파묻혔다.

 

그럭저럭 괜찮은 직업과 외양, 지지적인 가족 및 교우관계를 가진 반듯한 친구였고, 자신의 불안이나 우울을 드러내는 것을 민폐라 여겼기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A의 불안의 깊이가 가늠되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부터 A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걱정들로 가득 찼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이래서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실패하면 어떡하지? 날 오해하면 어떡하지?

사람들은 내 일을, 내 능력과 내 관계를 평가하고 때론 난도질할 준비가 되어있어 보이는데, 내가 이걸 언제까지 버텨야 할까?

 

이런 불안이 동시다발적으로 자신을 옥죄니 A는 금세 무력해지기 일쑤였고 생산적인 일을 할만한 생의 에너지가 점차 사그라들고 있었다.

휴일에는 외출을 하지 않으면 불안이 자신을 덮쳐 먹어버리는 것 같아 일부러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억지로 어울리거나 종일 잠을 자거나 둘 중 하나였다.

집에 혼자 깨어 있을 때엔 멍한 기분에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마저 들어 무서울 정도였다.

어떤 일을 해도 좋은 평을 듣지 못하고, 어떤 일을 하지 않아도 좋은 평을 듣지 못한다면 이제는 그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며 자조적인 농담을 하기도 했으나 농담은 어쩐지 진담처럼 확고히 들렸다.

 

사진_픽사베이

 

끝없는 우울과 불안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과정에서 혹여 나쁜 평가를 받지 않을까 스스로를 괴롭히고 좀처럼 자신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완벽주의의 프레임에 갇혀 한 발자국도, 혹은 반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완벽주의를 다차원적 개념으로 분석한 고전적인 연구들에 따르면, 완벽주의는 크게 다음과 같은 여섯 차원으로 분류됩니다.

 

(1) 실수는 곧 실패라 여기고 이러한 실수 후에 평가와 평판이 추락할 염려에 몰두하는 '실수에 대한 염려'

- 그러나 사람들은 당신의 실수나 실패에 관심이 없습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의 실수나 실패에 관심이 없듯이.

 

(2) 스스로에 대해 과도한 기준을 설정할 뿐 아니라 자신이 하는 평가의 중요성을 과대하게 지각하는 '개인적 기준'

- 그러나 역시 사람들은 당신이 설정한 셀프-기준에 관심이 없습니다.

당신이 달성하든, 달성하지 않든, 당신이 스스로를 높게 혹은 낮게 평가하는 모든 것에, 원래 관심이 없습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하듯이.

 

(3) 부모가 자신에게 매우 높은 목표를 설정했다고 믿는 '부모의 기대'

- 주 양육자가 당신에 대해 매우 높은 목표를 실제 설정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는 <그래서 어쩌라고> 정신이 필요할 뿐 부응의 노력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4) 부모가 과거 혹은 현재에 지나치게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음을 지각하는 '부모의 비판'

- 보통 직장에서 후배나 동료가 미워 죽겠는 경우는 나와 일처리가 너무 달라서, 가족 내에서 자식새끼가 너무 미운 경우는 대개 나와 너무 닮아서 입니다.

우리의 미성숙한 부모들이 혹독하리만큼 우리를 비난해왔던 이유.

 

(5) 과업을 완료하거나 성취해낼 능력에 대해 스스로를 의심하는 '행위에 대한 의심'

- 물론 걱정과 의심은 여러 기능을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나 우리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약한 수준의 걱정과 의심은 미래에 대한 대비를 하게 만들기에 진화적 이점을 가지고, 강렬한 수준의 의심은 -역설적이게도- 지금 당장 미래를 위해 실제적인 준비를 해야 하는 위기 상황임에도 마냥 불안을 껴안고 현재에 부유할 수 있게 하는 이득을 가져오죠.

말로만 시험공부를 하는 우리의 과거를 좀 보세요.

 

(6) 체계나 순서를 강조하는 '조직화'

- 불안 높은 상사나 선배들이 제일 싫어하는 속담이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이죠.

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속담은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인데, 굳이 안 두드려도 됩니다. 대충 갈 수 있으면 좀 대충 가세요.

 

사진_픽셀

 

이들을 대상으로 한 뇌영상 연구에서는 전대상피질(ACC : Anterior Congulate Cortex)과 관련한 결과를 빈번히 보고합니다.

대뇌의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 혹은 내측전두이랑(medial frontal gyrus)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영역(ACC)은 인지 및 정서적 정보를 통합하는 기능을 하며, 특히 거절과 같은 사회적 고통에 반응하고 실수를 탐지하고 정서를 조절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살아가면서 절망적인 사건들과 실패들을 예상보다 더욱 자주 겪게 된다는 사실을, 성인이 된 당신은 이제 곧잘 받아들이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끝도 없는 좌절감, 형편없는 자존감, 저하된 자기효능감으로, 아침에 눈을 뜨면 '모든 게 나쁜 꿈이었던 것이 아닐까?'하며 헛되고 헛되게 그간의 일을 되짚어 보기도 하지요.

 

다행히도 우리는 전대상피질을 비롯한 뇌의 다양한 영역에 장착된 기능들 덕분에, 불안과 자의식을 차츰 적절히 다독이며 실패까지도 자신의 삶 안으로 통합시켜 나아갑니다.

이번 생에서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마음을 재정비하고는, 사랑 혹은 건강과 같은 가치들에 다시 집중하도록 동기화되지요.

성숙을 위한 '최적의 좌절'을 잘 겪어나가고 있는 것 맞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불필요하게 잡다한 염려와 자기 비난을 끌어다 붙여 오늘의 불행에 몰두합니다.

이 역시 일부는 자기와 타인에 대한 정보, 긍정-부정적 정서, 그리고 자극 간 오류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 전대상피질 때문입니다.

목표 행동에 몰입해 반짝반짝 빛을 발하다가도 어느 순간 문득, 자기와 타인의 평가 차이, 혹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예민해지는 때가 있지요.

이렇게 오류와 간극에 한 번 예민해지기 시작하면 이 위험한 습관은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특히 평판과 평가, 실수에 예민한 완벽주의 유형(ECP : Evaluative Concern Perfectionism)은 개인적 기준에 기반한 완벽주의 유형(PSP : Personal Standard Perfectionism)과도 구분되는 전대상피질 이상성을 드러냅니다.

이들은 과제에서의 실수 직후에 갑자기 반응속도가 느려지고 이 전대상피질을 포함한 내측전두이랑의 과잉한 신경활성화 정도를 특징적으로 보이지요.

즉, 완벽주의자도 다 같은 완벽주의자는 아니었어서, 이 평가 염려만 적다면 실수 탐지 및 정서 조절과 관련한 이 뇌 영역의 활성화 정도는 두드러지지 않으며 수행도 그리 나쁠 일이 없습니다.

 

이 상태가 지속되는 경우, 우리는 상처투성이의 자기개념을 손에 쥔 채로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한 채 제자리에 머무릅니다.

그렇게까지 완벽할 필요도 없고 실제로 완벽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 나의 불필요한 의지와 예민한 뇌가 부지런히도 합작해 만든, 불안과 완벽주의의 유리벽에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아 아무 결과도 일어나지 않는 연옥과 같은 상황을 차라리 편히 여기고 이 상태에 의존합니다.

 

사진_픽사베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2017년의 연구에서도, 전대상피질의 부피가 증가할수록 위에서 소개한 완벽주의 경향성 일부가 두드러짐을 보여, 해당 영역이 완벽주의에 대한 주요 신경해부학적 기반임을 밝혔습니다.

즉, 전대상피질의 회백질 부피가 증가할수록, 불안 및 우울과 관련 있는 '실수에 대한 염려'와 '행위에 대한 의심'이 증가했던 것이죠.

특히 '행위에 대한 의심'은, 전대상피질의 부피가 증가된 특징을 보이는 개인이 불안, 우울, 부정적 정서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매개적 변수로 기여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완벽주의 경향성이 세대를 지나오면서 선형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울과 불안으로 가는 포털이 점점 넓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2017년의 메타 연구에 따르면, 1989년부터 2016년까지 자신과 타인에 대한 완벽주의적 기준이 꾸준히 높아지는 추세였고, 타인이 내게 원하는 기준이 얼마나 높은지를 짐작하게 했더니 그 수준도 점점 높이 추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완벽주의는 만성적인 자기 불확실성과 자기 의심, 저하된 자기효능감, 우울 등 꽤나 병리적인 증상으로 빈번히 이어지기에, 스스로가 완벽주의적 불안을 가지고 있다면 이를 하나의 임상적 징후로 자신의 행동 패턴을 더 정확히는 결과 산출의 패턴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달려 나가는 걱정을 멈추고, 더 이상 생각과 행동과 결과물을 수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만 손 떼고, 그냥 머릿속에서건 실제에서건 '외부로 전송' 버튼을 누르고, 대충 마무리하고 방문 닫고 밖에 나가서 커피나 한 잔해요.

자신의 수행과 결과물에 대해 '완벽히' 안심시켜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크겠지만, 나를 '완벽히는' 모르는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확신을 주기란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뭘 알겠어요?

 

한편으로는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을 가장 잘 알기에, 본인이 어떤 오류와 간극들에 예민한지를 빠르게 파악하고 불안의 스위치를 끄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나의 밑바닥을 그럭저럭 안정적으로 푹신하게 다져가며 부정적 정서를 조절하는 셀프-위로 역시 할 수 있으면 해야 합니다.

 

'신경 끄자. 이만하면 괜찮다.

완벽은 됐고, 그냥 꽤 괜찮은 나로서 존재하면 돼.

잘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저자 약력_ 허지원 임상심리전문가, 정신건강임상심리사1급
중앙대학교 심리학과 조교수
대한뇌기능매핑학회 젊은연구자상 수상
한국임상심리학회 특임이사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홍보이사
보건복지부 정신건강기술개발사업 "CBT기반 어플- 마성의 토닥토닥" 연구 책임자
한국연구재단 뇌과학원천기술개발사업 "정서조절 인공지능 모델 개발 II" 연구 책임자

 

*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해당 글들을 책으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저자 : 허지원)
  - 뇌과학과 임상심리학이 무너진 마음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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