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박세인 정신건강 간호사]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가을이 떠올랐다.

약기운 때문에 졸려서요, 하는 나른한 목소리와 조금 피곤한 듯한 미소를 나긋나긋 지어 보이는 모습에서 나는 왠지 모르게 가을을 떠올렸다.

낮병원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안 그녀는 점점 생기를 되찾아갔다.

병에 대해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특유의 아기자기한 귀염성과 편안함으로 인기가 많았던 그녀는 사회에 나가서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그녀는 싱그러운 봄이 되어 떠났다.

사진_픽사베이

 

그를 처음 만난 건 3년 전이었다.

훤칠한 외모이지만 무뚝뚝해 보이는 첫인상은, 두고두고 새로 오는 멤버들과 공감대를 만들곤 했다. 물론 첫인상과 달리 배려심 넘치고 의리 있는 좋은 사람이었다는 반전과 함께.

그 날은 국내 정신건강의학과 추계 학회 날이었다. 당직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치료진이 학회에 가서, 예약 환자도 별로 없고 병원은 적막함마저 감돌았다.

아침 9시, 평소라면 당연히 자고 있었을 그가 예고도 없이 외래에 나타났다.

"진료 예약은 다음 주인데, 날짜를 헛갈렸어요? 오늘 휴진이라 어차피 다음 주에 와야 돼요. 밤새면서 일하느라 정신이 많이 없나 보네. 얼른 가서 자요. 이따 일어나면 낮병원 나오고."

그는 잠이 덜 깬 건지 머뭇거리다가, 뭔가 다시 말을 꺼내려다가, 말았다.

"아 아니에요." 하며 다시 말을 하려다가 말고, 가겠다고 했다.

'왜 저러지, 어제 회원들이 뭉쳐서 회식한다고 들었는데 술까지 마신 건가? 아니면 진짜 잠을 못 자서 정신이 없는 건가...'

평소와 너무 다른 모습이 이상했지만 밤을 새웠다는 그를 일단 재워야 할 것 같아 집에 보냈다. 그는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서 다시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두 시간이 지났다. 정신없는 평소와 달리 휴진이 많은 그날은 썩 바쁘지 않았다.

간간이 오는 전화와, 예약환자를 응대하고 있던 중에 옆집 소아과 교수님이 쓰윽 들어오셨다. 의아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저기 남자화장실에, 빨간 옷을 입은 청년 하나가 커피를 엎었는데 아까부터 계속 서서 어쩔 줄 모르고 있어요. 미화원님이 닦으면 되니 괜찮다고, 그냥 가시라고 해도 안절부절 못 하면서 계속 그냥 서있는데 아무래도 여기 환자 같아서요."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은 불행한 예감이 들었다. 서둘러 달려간 화장실에는 안타깝게도 내가 떠올린 그대로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림_박세인

 

"왜 이러고 있어요. 왜 아직도 집에 안 가고 여기 있어요.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던 거에요..."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멍하니 서서 혼란스러워 보이는 그녀는 마치 딴 사람 같았다.

지난 주까지만 해도 같이 웃으며 농담을 하고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어제 다른 회원들이랑 행사에도 참여하고 회식도 다녀왔다던 그녀는, 하루 만에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머릿속에 온갖 나쁜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유난히 약을 먹기 싫어해 종종 빼먹곤 했던 그녀가, 결국 한 달에 한 번 맞는 주사제로 바꾸었는데도 설마, 주사를 처방대로 안 맞고 거르고 있었나. 아니면 내 당부에도 회원들끼리 진탕 술이라도 마신 걸까. 아니,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나.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차라리 술 때문이었으면 좋겠다. 깨고 나면 괜찮아지게.'

 

그러나 그녀에게서는 술냄새도 나지 않았고, 술을 마셨다고도 하고 아니라고도 하며 오락가락했다.

모든 질문에 그녀는 네니오였다. 그렇다고 했다가 아니라고 했다가. 나의 목소리는 그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낮병원에서 몇 년째 알아왔지만,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나름대로 회원들에 대해서 살뜰히 신경 쓰고 챙긴다고 했는데, 내가 여전히 환자를 잘 모르고 있었나 하는 자책도 들었다.

'증상은 언제부터 숨기고 있었던 걸까. 정말로 갑자기 나타난 게 맞나. 2주 전 모임에서 오늘따라 집중이 잘 안된다고 했던 그의 말을 단순히 '밤새 일하고 잠을 잘 못 자고 와서 그런가 보네' 하고 웃어넘겼던 우리가 잘못이었나. 잘 지내는 줄만 알았는데. 병원 프로그램 말고도 다른 일에 얼마든지 도전해보라고, 잘 하고 있다고. 사회에 나가서 일도 하고 배우기도 하면서 자기 삶을 살라고. 항상 기대하고 있던 그였는데.'

담당의를 기다리며 연거푸 이어지는 나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머릿속이 복잡한지, 애꿎은 머리를 벅벅 헝클어뜨리던 그는 고개를 푹 숙이며 겨우 한마디 했다.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에요..."

 

사진_픽셀

 

당직을 서느라 온갖 업무가 많은 와중에도 담당의는 제법 빨리 외래에 도착해서 그를 만났다. 그리고 우리는 불행한 결론에 다다랐다.

그의 병은, 재발이 흔한 병이다. '만성질환'이 맞다.

증상이 나아져도 약을 먹지 않으면 대부분 재발하고, 약을 잘 먹는 중에도 종종 재발하는 그런 병이다.

'제발' 하고 바랐지만... 그는 재발한 것이 맞았다.

 

그의 성격과, 평소 모습을 알아왔던 나는 속상하고 착잡했다. 그가 그의 병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오늘 기억될 자신의 모습이 또 얼마나 큰 절망으로 느껴질까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회원이 재입원하는 경우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특히나 오랫동안 열심히 잘 해왔던 그였던지라 나는 더 안타까웠다.

최근까지 기능저하가 뚜렷하지 않았으니 빠르게 개입한 만큼 증상이 잡히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였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그의 실망, 좌절, 절망...

 

"약을 꾸준히 먹어야 합니다. 약을 자의로 중단하면 재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약을 먹어도 가끔 재발할 수는 있지만 증상의 강도가 훨씬 약해집니다."

정신과에서 환자와 보호자 교육을 하며 수백 번, 어쩌면 그 이상 반복해왔던 말이지만 이 날 만큼 나에게 간절하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너무 익숙해서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던 '재발'이라는 단어가 참 아프게 느껴진 날이었다. 그와, 그의 가족의 아픔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이날, 나는 묵묵한 죄책감과 무력감을 느꼈다.

"엄마, 손 좀 잡아줘..."

부축을 받으며 응급실로 가는 그의 얼굴이 울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괴로운 표정으로, 그는 힘없이 비틀거렸다.

 

그는 다시 입원했다.

응급실에서 안정제를 맞았고, 아마도 곧 잠들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낯설고도 익숙한 병동의 풍경에 그가 너무 좌절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기적처럼 한 번 맞은 주사에 평소의 그로 돌아와서 '아 내가 그때 왜 그랬지. 샘, 다음 주에 낮병원에서 봐요.'하고 멋쩍게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진_픽셀

 

언젠가, '나의 병에게 편지 쓰기'라는 시간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회원들은 마치 벼르기라도 한 듯 "작성 시간 드릴 게요"하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혹은 종이를 받자마자 뭔가를 부지런히 적어 내려갔다.

솔직한 한 마디 한 마디가 진하게 뇌리에 박혔다.

 

​나를 아프게 했던 나의 병에게.

보잘것없었던 나의 병에게.

무섭고 힘들지만 고맙기도 한 나의 병에게...

고2 때까지 너를 몰랐는데, 어느 날 갑자기 너는 나에게 왔지.

나는 괜찮은 것 같은데 엄마가 너무 심각하게 내가 이상하다는 거야, 병원에 가보니까 왜 이제야 왔냐고 그러더라고.

평생 약을 먹을 생각을 하면 우울하고 슬퍼.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10년을 앓아도 좋아, 하지만 날 불편하게는 해도 해는 끼치지 마. 난 절대 재발 안 할 거야.

그래도 생각해보면, 네 덕분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어.

추억도 생겼어.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낮병원을 떠나기 며칠 전, 그는 또다시 오전에 불쑥 나타났다. 오후 프로그램을 땡땡이치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하고는 한참 동안 외래 근처를 맴돌았다.

점심때가 되도록 집에 가지 않는 그를 보고 땡땡이친다면서요, 왜 안 가요? 하고 짓궂게 질문하는 나에게 그는 알록달록한 포장지에 싸인 도톰한 책 한 권을 내밀었다.

3년 내내 책 좀 읽으라는 잔소리를 했던 그에게서 책 선물을 받을 줄이야.

"오늘 마지막 날이신 거 아니었어요? 에이, 괜히 아침부터 왔잖아" 하며 웃는 그의 털털한 웃음에 내심 안도감을 느꼈다.

친구를 만나러 간다며 돌아선 씩씩한 뒷모습을 보고 나는 생각했다. '여전히 내 환자를 잘 모르고 있었네.' 그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강한 사람이었다.

 

병동은 여전히 많은 환자들이 입원하고, 퇴원하고, 퇴원했던 환자가 다시 입원을 하기도 하며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안면이 있는 환자가 다시 입원하면, 솔직히 반가움보다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도, 어쩔 수 없는 인생의 위기가 온다면, 그래서 병동을 다시 찾아온다면 나는 그들의 간호사로, 언니로, 선생님으로, 친구로 다독이는 사람이 되어 주고 싶었다.

물론 재발하지 않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쪽이 훨씬 더 흐뭇하고 행복하겠지만.

 

병동으로 돌아온 며칠 후, 나는 입원 환자 명단을 보고 낮은 탄식을 했다.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과 등록번호, 그리고 진단명은 병실에 누워있는 환자가 동명이인이 아닌 내가 아는 그녀라는 것을 매정하게도 증명하고 있었다.

응급실에서 주사를 맞고 한나절을 잤다는 그녀는 내가 방에 들어가서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니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처음 봤던 그 날처럼, 나긋한 미소를 지으며 내 목을 꼭 끌어안은 그녀의 등을 나는 그저 말없이 토닥였다.

사진_픽사베이

 

아픔이 두렵고 힘들었던 이들이지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회복하고 이겨내며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문득 기적이란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치료자는 단지, 곁을 지키며 함께 하는 것이 역할이 아닐까 싶다. 때로는 그들이 보여준 희망과 기적에 오히려 내가 치유받기도 한다. ‘그’도 ‘그녀’도 ‘그들’도 ‘우리’도 결국 그저 기적 같은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도 그리고 그녀도 모두 퇴원했다.

그들의 새로운 시작과, 봄날 같은 안녕을 빈다. 

 

 

작성자_박세인

만화를 보는 것도 그리는 것도 좋아하는 정신건강 간호사. 
13년 전 정신과 간호사에 대한 로망으로(?) 아주대학교 간호대학에 진학했다.
2년간 아주대학교병원 외과, 흉부외과병동을 거쳐 정신건강의학과병동에서 4년, 
정신건강의학과 외래와 낮병원에서 3년을 지냈다.
아직 로망이 깨지지 않아서 재미있게 근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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