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선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Q) 고등학교 시절 한 친구 놈이 걸어온 장난에 반응하다 몸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먹이 오가는 싸움이 아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실랑이를 할 때 밀고 밀치는 그런 행위였습니다.

그러던 중 점차 제가 밀리자, '내가 지는 것 같다', '굴욕적이다', '패배감이 든다', '누가 나를 약하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지?' 등의 부정적인 생각이 한 번에 확 몰려오면서 목 뒷덜미부터 달아오르더니, 뒷머리, 그리고 얼굴까지 달아올라 미칠 것 같았습니다.

만약 그때 주먹이 오고 가거나 했다면 이렇게까지 심해지진 않았을 텐데, 몸싸움은 그냥 흐지부지 끝나버렸습니다. 그리고 같이 수업을 들으면서 그 친구 놈을 볼 때마다 내가 진 거 같은 분함, 복수심, 패배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눈을 볼 때마다 뒷목부터 뒷머리가 달아오르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집중도 기억도 사고 기능도 일반적인 일에 감정을 느끼는 것도 점차 불가능했습니다.

 

며칠간 밤에 잠도 못 자고 눈이 충혈될 정도로 얼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스스로 무언가 이상이 있다는 걸 깨달았고, 내가 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 원인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를 꺾으면 증상이 사라질 거라 생각해서 친구를 불렀는데, 그 친구는 당황스러워하며 ‘이게 무슨 일이지?’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때의 일은 저에게만 심각했지, 친구에게는 아무런 일도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끝내 제가 그 친구를 끌어내서 결국 주먹이 오고 갔고, 속이 시원했습니다.

선생님이 때마침 근처에 계셔서 싸움은 중단되었지만, 그날은 씻은 듯이 증상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이내 증상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 친구를 볼 때마다, 그리고 그 친구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람을 볼 때마다 증상이 발현되는 상황이 점차 확대되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사진_픽셀

 

여러 병원을 다니며 여러 치료를 받았습니다. 주로 일반적인 약물치료를 받았고 하루하루를 지옥을 버틴다는 느낌으로 살았습니다. 현재 불편한 증상들을 아래 열거하겠습니다. 혹시 다른 치료법이나 의견이 있으시면 꼭 답글 부탁드립니다.

1. 사람과 무관하게 컴퓨터나 책을 보거나, 학습 등을 할 때도 뒷머리가 마비되고 긴장이 됩니다.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했고, 상대방이 무슨 말을 했는지, 방금 읽은 구절이 무엇인지 생각이 잘 나지 않습니다.

2. 땀이 날씨와 무관하게 비정상적으로 많이 납니다.

공황발작증세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샤워하고 나왔을 때, 당황한 상황에 놓일 때, 무언가 집중하려 할 때, 여러 장소들을 이동할 때, 사람이 많은 곳 등에서 뒷머리가 마비되고, 얼굴이 달아오르거나 흑빛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겨드랑이와 가슴, 등에 땀이 미친 듯이 많이 납니다,

3. 우울, 불안, 강박, 사고장애, 망상장애 등. 정신과 병명은 크게 중요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어떠한 원인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는지가 제일 중요한 본질이고, 이게 해결되면 남은 증상들은 차차 사라질 거라 생각합니다. 겪고 있는 신체적인 증상으로 학업이나 일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힘이 듭니다. 여기에 혹시 어떤 약물치료 혹은 인지행동 치료, 혹은 교감신경차단술(다한증 환자들 하는 것) 등 최근에 나온 치료법이 있는지, 혹은 이밖에 한번 권해볼 만한 방법이 있는지 조언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삶의 한 순간이 질문자님을 너무 큰 굴레에 사로잡히게 만든 것 같습니다.

그 큰 굴레는 다름 아닌 생각의 굴레인 것 같습니다. ‘(만약) 누가 나를 약하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지? 내가 힘에서 밀리면 어떻게 하지?, 내가 지면 어떻게 될까?’ 머릿속의 이러한 생각들은 단순히 머릿속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의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분함, 복수심, 패배감 같은 것들이죠.’

이러한 감정들은 여러 신체 반응들을 동반합니다. ‘뒷목부터 뒷머리가 달아오르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잠도 못 자고, 눈이 충혈되고, 얼굴이 터질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땀' 같은 것들이죠.’

 

일단 증상을 조금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어떠한 원인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는지가 제일 중요한 본질이고 이게 해결되면 차차 남은 증상들은 사라질 것이다’라는 질문자님의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런 본질을 다루기 위해서는 많은 육체적, 정신적인 에너지가 필요한데, 표면적인 증상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런 에너지를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바로 눈앞에 닥쳐있는 괴로움에 사로잡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개 점차 표면에서 내면으로 치료를 진행하는 것입니다.

증상 조절을 위해서 첫 번째로 권해 드리는 것은 ‘호흡’입니다. 조금 부끄럽지만 제가 쓴 글이 있으니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psychiatric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2302

사진_픽사베이

 

두 번째는 Eye movement desensitization and reprocessing(EMDR)이라는 치료법입니다.

눈동자를 움직이면서 치료하는,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 우스워 보이지만) PTSD 등 외상성(traumatic한) 기억들을 다루는 가장 공인된 치료법입니다.

자세한 방법은 기회가 되면 소개하겠습니다.

 

조금 더 내면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질문자님이 겪은, 친구와의 장난과 몸싸움의 기억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변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의미’는 변할 수 있습니다. 친구가 놈이 되고, 원수가 되어 버린 일. 패배감과 굴욕을 맛보았던 일. 이런 과거에 대한 의미는 바뀔 수 있습니다.

그저 ‘아 내가 그 친구와 그런 다툼이 있었지, 그 다툼 때문에 많이 괴로웠지, 아~ 그런 일이 있었지!’라는 정도로 말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현재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미래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럼 과거에 대한 의미가 바뀝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이 당한 성폭행의 기억을 그저 끔찍한 기억이 아닌 자신의 현재를 만들어낸 원동력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성폭행이 가지는 의미조차 누군가에게는 헤어 나올 수 없는 굴레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거죠.

이 의미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이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이를 돕는 치료법으로는 ACT : Acceptance & Commitment Therapy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질문자님이 가진 굴욕적인 패배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아마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종류의 어떠한 ‘개념’에서 나온 것일 겁니다.

이렇게 ‘개념’지어진 것들은 그 개념 속에 속하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차별적이고 경멸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조금 과장하면) 강한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는 약한 남자를 강하지 않은 남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남자’로 보지조차 않는다는 것이죠.

사진_픽셀

하지만 강함이란 개념은 문화에 따라, 심지어는 개인에 따라 너무나 다릅니다.

어떤 문화는 정말 힘이 센 사람을 강하다고 보지만, 어떤 문화는 부드럽고 포용력이 큰 사람을 강하다고 보기도 하는 거죠.

우리가 이미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개념들이 단지 조금만 다른 문화적인 시각으로 보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이 사건과 관련 질문자님이 가진 어떠한 ‘개념’에 대해 한 번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죠.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질문자님도 알고 있고, 누구나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런 마음을 다루는 방법을 직접 연습하지는 않고 글과 말로만 단지 읽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방법, 노래를 잘 부르는 방법, 축구를 잘하는 방법, 농구를 잘하는 방법 등 그러한 방법들에 관한 글과 이야기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단지 그 글을 읽고, 이야기를 듣는다고, 그림을 잘 그리거나, 노래를 잘 하거나, 축구를 잘 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방법에 따라 무수히 반복하게 되면 그때서야 조금 따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오늘 한 발자국을 내디딜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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