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 픽사베이

 

앞에 언급하였던 양성 강화와는 달리 자해행위가 음성 강화되는 경우는 환자들이 느끼는 불편한 감정이나 괴로운 생각,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자해를 통해 자기 자신을 처벌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무의식 속의 분노는 분출의 통로를 찾기 위해 처벌의 대상을 찾아 헤매지만, 그렇지 못하고 억압된 분노는 그 처벌의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 규정짓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불편한 감정이나 우울감, 자살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경우 그것을 외면하고자 환자들은 스스로 신체에 상해를 입한다. 자살하고 싶은 충동에 대한 죄책감, 지나친 우울감에 대한 죄책감은 스스로에 대한 징벌을 필요로 하게 되고 징벌은 자살에 미치지 않는 자기 파괴로 치닫으며 조건화 된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가혹한 초자아(super-ego)는 징벌적 초자아가 되어 용납할 수 없는 감정의 순간마다 자해의 형벌을 내린다. 찌르듯 아파오는 통증으로 형벌을 받음으로써 감당할 수 없는 ‘죄’에서 사면 받고 해방된다. 내면의 ‘죄’로 이름 붙여진 감정의 덩어리는 신체의 고통으로 하여금 그 책임을 대신하게 한다.

이러한 경우와 같은 환자들의 기저에는, 견디기 힘든 정신적 갈등과 괴로움을 보다 견디기 쉬운 형태로의 고통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방식의 대처방식이 강화되어(reinforced) 있다. 왜 그런 건지도 모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모를 답답함과 괴로움, 외로움에 비해서는 손목의 피부가 뜯어져 나가는, 그래서 피가 뚝뚝 흐르는 쓰라린 고통이 그들에게 훨씬 더 익숙하고 이해하기 쉬운 형태의 고통인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떠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자해이건, 자살의 목적이 없고 치명적이지 않은 비자살적 자해라 하더라도 자해의 시도가 많아질수록 자살이라는 목표를 이룰 가능성이 점점 더 높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가벼운 손상에 그치는 자해라 하더라도 반복된 자해는 자살 위험성을 심각하게 시사한다. 이는 자해가 근본적으로 내적 갈등에 대한 자기파괴적 대처방안을 조건화시키기 때문이다. 자기파괴적 대처 이외의 건강한 대처방안이나 방어기제를 충분히 발달시키지 못했기 때문이고 말이다. 피폐하고 파괴적인 가정환경이나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막대한 스트레스는 성숙한 방어기제를 익힐 수 있을만한 마음속의 여유를 주지 못하게 마련이다.

실제로 단지 정신증이나 정동장애, 인격장애 등 기존의 정신적 문제에 의한 자해행위, 자살시도를 하는 사람의 경우가 아닐지라도, 비자살적 자해나 자살시도 장애 등에 해당하는 사람들 역시 잠재적인 위험을 충분히 가지고 있음이 잘 알려져 있다. 정신과적 장애가 없는 젊은 자살시도자를 추적 연구하였던 한 연구에서는 자살시도, 자해행위를 하였던 사람들이 중년기에 이르러 여러 정신적 문제를 앓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자해를 하였던 사람들은 비시도자들에 비해 우울증, 물질 남용, 추가 자살시도 등 심각한 정신건강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보다 자주 폭력, 범죄, 학대 등에 관련되어 있었다. 또한 사회복지 수혜자나 무직자가 되어 있는 경우가 더 많았고, 외롭고 불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다시 1888년 크리스마스 이틀 전 프로방스의 노란집, 면도칼을 귀에 가져다내는 고흐의 모습으로 돌아가 보자. 고흐의 병증에 대해서는 우울증, 조울증, 조현병 등 갖가지 가설이 제시되고 있으며 그런만큼 그는 심각한 정신건강의 위기를 맞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가 귓볼을 잘라내던 순간, 잘라든 귓불을 들고 브로델의 매음녀에게 귀를 전달하던 순간, 그는 일시적 정신병적 상태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고갱의 회상에 따르면 그 이전부터 고흐는 이미 정신병적인 상황에 빠져있었을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의 자해가 위에서 설명하였던 비자살적자해 (NSSI-nonsuicidal self injury) 라는 질환군에 해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흐 역시 당시의 고통과 혼란스러움이-자살 목적이 아닌-귀를 베어내는 자해행위로 표출되었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귀를 잘라낸 비극은 단순히 고흐의 광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흐를 광기로 몰고 갈 정도의 극심한 외로움과 버림받음에 대한 괴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버림받음, 인정받지 못함에 깊어진 상처를 견뎌내기엔 그의 영혼이 너무나 쇠약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 깊은 상처의 고통에 비하면 귀를 끊어내는 통증이 차라리 고흐에게는 견디기 쉬웠을지 모른다.

고흐는 그 비극적인 사건 이후로 더욱 미치광이 화가로 내몰리게 되었다. 심지어 아를의 마을 사람들은 고흐를 정신병자라며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그의 우울증은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그 이후로도 반복된 자살 시도는 그의 영혼을 더욱 병들게 했다. 그렇게 2년뒤 1980년 고흐는 “고통은 영원하다 (La trist esse durera toujours)"라는 말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정신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육체를 파괴한다. 그러나 육체를 파괴하며 자기파괴에 익숙해진 정신은 결국 스스로를 더욱 고통과 외로움으로 이끌어가며 파멸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렇게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신의 잘못된 몸부림은 스스로를 파괴한다.

 

OECD 국가 자살률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우리나라의 작금에, 자살로 비극적인 생의 맺음을 마무리하고 있는 이들 보다도 수십 배는 더 많은 이들이 자살시도와 비자살적 자해로 고통을 울부짖고 있다. 자살시도나 자해는 그것이 비록 반복적이고 치명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환자들의 아픔을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모습임에 틀림없다.

스스로에 대한 파괴적 충동이나 행위는 그 사람의 깊은 공허감과 괴로움, 그리고 그에 대한 미숙한 정신적 대처능력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일면이라는 것이다. 자해를 일으키는 내면의 핵심 감정은 분명 분노와 외로움이다. 그러나 자해라는 파괴적 형태로 드러나는 밑바닥의 무의식적 역동에 대한 섣부른 직면은 오히려 강한 저항과 반발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문제점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다치게 함으로써 자신의 정신적 위기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주변에 알리는 지친 영혼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주변의 따뜻한 공감과 격려이다. 그 파괴적 행위에 그저 아연하고 그 잘못된 방향을 꾸짖고 가르치기보다는, 그렇게까지 치닫게 된 그 영혼의 혼돈을 어루만져주는 손길과 말 한마디에 그들은 여유를 한줄기 찾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이후에 전문의의 손길을 통해 보다 건전한 방법의 대처방안을 배워나가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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