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증 연구의 선구자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의사 한스 아스퍼거는 히틀러의 킬링머신(killing machine)의 톱니바퀴로, 수십 명의 불쌍한 장애아들을 나치의 안락사 클리닉으로 보낸 철면피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 dailymail.co.uk(참고 1)

 

자폐증 연구의 선구자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의사 한스 아스퍼거(참고 2)는 나치 정권에 광범위하게 협조했으며, 수십 명의 어린이들이 참혹하게 살해되는 데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나치 체제 하에서 벌인 끔찍한 행각의 전말은 4월 18일 《Molecular Autism》에 게재되었으며(참고 3), 자세한 내용은 곧 출간되는 『아스퍼거의 어린이들: 나치 시절 빈(Wien)에서 연구된 자폐증의 비밀』이라는 책에 실린다.

아스퍼거는 자폐증을 최초로 기술한 연구자들 중 한 명이며, 그가 수십 년 동안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는 나중에 「자폐 스펙트럼(autism spectrum)」이라는 개념이 확립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학자들은 그동안 "아스퍼거가 나치당에 협조했으며, 특정한 질환이나 장애를 보유한 어린이들을 안락사시킨 나치 활동에 연루되었다"는 설(說)을 제기해 왔다.

 

이번에 새로 발표된 논문과 저서에 따르면, 아스퍼거는 수십 명의 어린이들을 빈에 있는 암슈피겔그룬트(Am Spiegelgrund)라는 클리닉에 보냈다고 한다. 암슈피겔그룬트는 의사들이 어린이들을 실험에 사용하거나 살해한 것으로 악명 높은 곳이다. 그곳에서 거의 800명의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상당수는 장애아이거나 환자였다. 클리닉의 관계자들은 가엾은 어린이들에게 바르비투르염(barbiturate)을 투여했는데, 그 약물은 종종 치명적인 폐렴을 초래했다.

이번 뉴스를 접한 전문가들 중 일부는, 그의 이름을 딴 「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 syndrome)」이라는 의학용어를 당장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매뉴얼(DSM-5: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참고 4)에서는 이미 다른 이유 때문에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용어가 폐기되었다"라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데이비드 만델 교수(정신과학)는 말했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DSM-5와 함께 관(棺) 속에 들어갔는데, 이번에 제공된 정보는 「아스퍼거 증후군」이 관 뚜껑을 열고 나오지 못하도록 막는 마지막 못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스퍼거의 오명(汚名)이 자폐증 이해에 기여한 그의 공로를 상쇄해서는 안 된다'며 신중론을 펼치는 전문가들도 있다. "나는 역사를 지우는 게 능사(能事)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빈 의과대학교의 헤르비히 체크 교수(의학사)는 말했다. "이제는 시조(장소·발명품·발견물에 붙은 명칭의 기원이 된 사람)라는 것을 개인의 대단한 명예와 동일시하는 관행과 작별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시조란 누군가를 역사적으로 인정한다는 뜻일 뿐이다. 그중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으며, 때로는 문제를 일으키거나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만한 소지가 있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사진_픽셀

 

침묵의 역사

아스퍼가 증후군이 의학 용어로 거론된 것은 1981년, 아스퍼거의 1944년 논문을 발견한 영국의 정신과학자 로나 윙이 그의 업적을 널리 알리면서부터였다. 1992년에는 국제질병분류집(ICD:  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에(참고 5), 그로부터 2년 후에는 DSM에 「아스퍼거 증후군」이 수록되었다.

ICD의 현행버전(ICD-10)에는 아직도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용어가 남아있다. 그러나 오는 5월에 발간되는 ICD-11에서는 - DSM-5에서 그랬던 것처럼 - 「자폐증」이라는 진단명으로 바뀔 예정이다(참고 6). 하지만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용어는 자폐 스펙트럼(autism spectrum)에서 경미한 쪽에 속하는 환자들을 지칭하는 데 아직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아스퍼거가 나치당에 정식으로 가입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서적과 학술논문에서는 그를 '자폐증에 걸린 어린이들을 킬링센터(killing center)에서 구원한 자애로운 인물'로 묘사했다. 그러나 2005년, 미하엘 후벤슈토프라는 의학사가(史家)가 "아스퍼거는 저명한 나치 의사 프란츠 함부르거와 절친한 관계였다"라고 폭로했다. 2015년 발간된 『뉴로트라이브: 자폐증의 전설과 신경다양성의 미래』(참고 7)라는 저서에서, 저널리스트 스티브 실버만도 아스퍼거를 함부르거와 연관시켰지만 나치의 우생학(eugenics)과의 관련성은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 후 역사가들이 아스퍼거의 임상기록을 샅샅이 파헤칠 때까지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새로 밝혀진 사실

아스퍼거가 일했던 어린이 클리닉은 연합군에게 폭격을 당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임상기록이 파괴됐을 거라고 믿어왔다. 2009년 체크 교수는 '2010년 개최되는 아스퍼거 서거 기념 심포지엄에 참가하여 발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아스퍼거의 행적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빈에 있는 오스트리아 정부 기록물보관소를 샅샅이 뒤지다, 잘 보관된 임상기록들을 발견했다. 체크는 나치당의 파일을 하나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아스퍼거는 당원이 아님에도 장애하고 나치에 충성했다'는 놀라운 비밀이 담겨 있었다. 또한 그는 아스퍼거의 케이스 파일과 메모는 물론 어록도 발견했다.

그로부터 2년 후, UC 버클리 유럽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는 역사가 에디트 셰퍼는 동일한 빈 기록물보관소를 방문했다. 그녀에게는 자폐아 아들이 한 명 있었으므로, 오랫동안 아스퍼거에 대해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아스퍼거가 영웅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을 거라 생각해 왔다. "나는 첫 번째로 발견한 파일에서, 아스퍼거가 장애 아동들을 살해한 나치 프로그램에 관여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오는 5월에 출간될 예정인  『아스퍼거의 어린이들』의 저자다.

 

아스퍼거는 자폐아들의 행동을 '나치당의 가치관에 위배된다'라고 기술했다. 예컨대, 그는 한 전형적인 자폐아에 대해서는 "자신의 커뮤니티에 통합된 구성원으로서 다른 구성원들과 상호작용을 한다"라고 적었지만, 한 자폐아에 대해서는 "외부의 제한이나 지시사항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관심사를 추구한다"라고 적었다.

아스퍼거는 자신의 임상 파일에서, 다른 의사들보다 훨씬 더 부정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장애나 정신질환을 보유한 어린이들을 기술했다. 예컨대 암슈피겔그룬트에서 일하는 내과의사들은 레오라는 소년을 "모든 면에서 발육 상태가 매우 양호함"이라고 적은 데 반해, 아스퍼거는 그 소년을 "매우 까다롭고 사이코패스적인 소년으로, 또래의 아이들 중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임"이라고 적었다.

아스퍼거와 가장 가까운 동료와 멘토들은 암슈피겔그룬트에서 시행되는 우생학 프로그램의 설계자들이었다. "그는 킬링시스템의 최고위층과 어울렸으며, 단지 수동적인 추종자는 아니었던 게 분명해 보인다"라고 셰퍼는 말했다.

체크는 아스퍼거가 최소한 두 명의 어린이들을 암슈피겔그룬트로 보내는 데 직접 관여했으며, 수십 명의 어린이들을 암슈피겔그룬트로 보낸 위원회에서 활동했음을 입증하는 증거를 발견했다. 아스퍼거가 클리닉에 수용된 어린이들을 구조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아스퍼거는 더 많은 어린이들을 암슈피겔그룬트로 보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과정에서 망설였던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라고 체크는 말했다.

 

사진_픽셀

 

더욱 커다란 유기체(greater organism)

기록물보관소에서 발견된 각종 파일과 메모들을 읽어보면, 아스퍼거가 자신의 클리닉에서 다뤘던 어린이들을 기술하는 태도가 바뀌어갔음을 잘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37년, 아스퍼거는 어린이들을 신중하게 분류했었다. 그러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지 몇 달 후인 1938년, 그는 자폐아들을 '두드러진 특징을 가진 어린이 그룹'으로 기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년 후에는 자폐아들을 '비정상적 어린이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급기야 1944년이 되자, 그는 자폐아들을 '더욱 커다란 유기체(the greater organism)를 벗어난 어린이들'로 기술했다. '더욱 커다란 유기체'는 나치의 이상(ideal)이었다'라고 셰퍼는 말했다.

셰퍼는 아스퍼거의 접근방법이 진화해간 과정을 이렇게 평가했다. "아스퍼거가 왜 그런 문체를 채택했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바로 나치를 선전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셰퍼는 말했다. 그녀에 따르면, 전쟁 기간 동안 아스퍼거의 경력이 고공행진을 했다고 한다. 유대인 동료들은 자리에서 쫓겨났지만, 그는 의학계에서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그는 재빨리 변신했다. 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마다 자신을 "나치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한 사람"으로 기술하고, 안락사 프로그램을 "완전히 비인간적"이라고 맹비난했다.

이번에 새로 밝혀진 사실들은 충격적이기도 하지만, 자폐증 연구의 중요한 부분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나는 1990년대에 아스퍼거의 삶을 파헤치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해 봤지만, 정보가 매우 빈약했다. 그쪽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역사학자들은 한 명도 없었다"라고 《Molecular Autism》의 편집자인 애틀랜타 주 소재 마커스 자폐증센터(Marcus Autism Center)의 에이미 클린 소장은 말했다.

 

나쁜 역사도 역사인가?

그러나 아스퍼거의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난 뒤, 사람들은 향후 적절한 대응방안을 놓고 의견이 분열되고 있다. 심지어 두 명의 역사가들 간에도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 셰퍼는 체크와 달리, 앞으로 "아스퍼거"라는 단어를 일절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아스퍼거라는 이름이 들어간 용어의 사용을 중단하는 것이, 그의 이름하에 목숨을 잃은 어린이들은 물론 지금도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딱지가 붙은 어린이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다"라고 밝혔다(참고 8).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진단받은 사람들 일부는 '이제 그 용어를 매장할 때가 왔다'라고 말하면서도 신중을 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먼저, '질병명이 생겨난 과정에 오점이 있고, 거기에 기여한 사람의 과오가 크므로 폐기해야 마땅하다'는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자폐증 환자인 매사추세츠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필 슈바르츠는 말했다.

"최소한 이름은 남겨둬야, 어두운 과거에 대한 교훈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다.

 

※ 참고문헌

1. http://www.dailymail.co.uk/sciencetech/article-5630411/Hans-Asperger-childrens-doctor-famed-early-work-autism-assisted-Nazi-euthanasia.html

2. https://spectrumnews.org/wiki/asperger-syndrome/

3. https://molecularautism.biomedcentral.com/articles/10.1186/s13229-018-0209-5

4. https://spectrumnews.org/features/special-reports/special-report-dsm-5/

5. https://spectrumnews.org/news/new-global-diagnostic-manual-mirrors-u-s-autism-criteria/

6. https://spectrumnews.org/opinion/viewpoint/why-fold-asperger-syndrome-into-autism-spectrum-disorder-in-the-dsm-5/

7. https://spectrumnews.org/opinion/reviews/book-review-neurotribes-recovers-lost-history-of-autism/

8. https://www.nytimes.com/2018/03/31/opinion/sunday/nazi-history-asperger.html

 

※ 출처:

스펙트럼(https://spectrumnews.org/) Science(www.sciencemag.org/news/2018/04/pioneering-autism-researcher-cooperated-nazis-new-evidence-suggests)에서 재인용.

 

글쓴이_양병찬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기업에서 근무하다 진로를 바꿔 중앙대 학교에서 약학을 공부했다. 약사로 일하며 틈틈이 의약학과 생명과학 분야의 글을 번역했다. 포항공과대학교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의 바이오통신원으로, <네이처>와 <사이언스>등에 실리는 의학 및 생명과학 기사를 실시간으로 번역, 소개하고 있다. 그의 페이스북에 가면 매일 아침 최신 과학기사를 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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