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기타를 배운 적이 있다. 당시에는 포크기타 소리가 너무나 멋져 보였다. 코드 잡는 연습을 할 때 기본인 C코드, D코드는 잡기가 쉬웠는데, F코드는 잡기가 어려웠다(전체를 잡아야 했으므로). 그래서 F코드를 없애고 연주하려고 했는데, 어느 노래나 F코드가 없는 것이 없었다. 아마도 F코드는 곡의 흐름상 굉장히 중요한 코드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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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정신과 전문의 이영문 박사님의 《명견만리: F코드의 역설》이라는 방송을 보았다. 정신건강이라는 주제도 다소 불편해하는 우리 사회에서 정신과 진단을 뜻하는 'F코드'라는 단어가 제목으로 등장한 것만으로도 굉장히 진보적이다.

방송에선 우리 사회에서 F코드 진단을 받은 사람들이 겪는 괴로움과 좌절을 다루었다. 마치 주홍글씨를 받은 사람들처럼 드러내 놓고 치료도 받지 못하고 국가와 지역사회로부터 돌봄과 지지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왜 너만 유별나게 구느냐고 좀 더 의지를 키워봐라 하는 식으로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며 개인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규정짓고 있다. 그렇게 한다면 그 무리를 배제하기가 굉장히 쉬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박사님 말처럼 개인의 정신건강은 곧 개개인이 이루고 있는 사회의 정신건강문제와 연결이 되기 때문에 그 병폐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가장 정점에 선 이슈가 바로 인천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미성년자인 가해자의 잔인한 범죄과정을 앞다투어 언론에서 보도하는 것을 들으며 나는 두 번 절망하였다. 아직 친구가 그립고 관심이 필요한 나이인 가해자를 보며 절망하였고, 사회가 이지경이 되도록 만들어놓고 그 앞에서 경악을 금치 못한다며 혀를 차는 어른들의 모습에 절망하였다. 마치 빌딩 옥상에서 돈을 뿌려놓고 그것이 주워가는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왜 이렇게 비도덕적이냐’라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

 

우리 사회는 다니엘 튜더가 말한 것처럼 '불가능한 성공, 불가능한 목적'을 정해놓고 그것을 향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유치원 때부터 가르친다. 성공을 획일적인 잣대로 들이대고, 거기서 낙오된 자를 암묵적으로 배제시킨다. 이런 교육환경, 양육환경에서 그런 사건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와 같이 개인과 사회의 정신 건강을 무시하는 결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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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는 정신건강의학과 약을 복용했던 한 이등병의 자살사건이 있었다. 약 복용 초기에 부작용으로 졸음이 쏟아져서 보초를 설 수 없게 되자 군대에서 구타를 당하게 되고, 그래서 약을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가 치료 초기에 다른 사람의 돌봄을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약을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없는 외로움과 괴로움에 방황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이 사회의 철저한 이중 구속(double band)에 갇혀서.

 

해외의 사례는 희망적이다. 정신질환 편견이 심했던 호주는 국가적으로 정신건강정책을 펴나가고 실행하면서 정신건강정책 선진국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웰웨이즈》라는 비영리단체에서, 정신질환을 앓았던 여성이 '동료 지원가'로 고용되어 현재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돕는 장면을 보여 주었다.

동료 지원가의 돌봄과 관심은 병식이 없어 고통받는 당사자들에게 편안함과 안도감을 주어서 마음의 빗장을 연다. ‘나는 당신의 고통을 압니다. 나는 지금 회복되었고 당신도 그렇게 될 수 있어요.’라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주는 것이다.

 

또, 정신질환에 신체와 같은 응급시스템을 갖추어 조기 정신증 예방과 같은 프로그램도 운영하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신체와 마찬가지로 정신도 골든타임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10대, 20대 발병률이 매우 높은 것을 생각한다면 젊은 청년들의 황금 같은 시기를 지켜주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조기에 대응하여 그들의 치료 계획과 평생계획을 세우는 데 지원해야 한다.

정신질환은 뇌질환이고 만성질환으로, 우리들이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따라서 신체의 일부인 뇌의 신경전달물질의 조절을 돕는 약물을 도움도 필요한 것이다.

 

또 여기에 관심과 돌봄의 《맘프로젝트》도 소개하였다. 함께 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과 충만함을 만들 수 있다. 나와 함께 밥 먹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으로 죽지 않을 힘이 생긴다.

강연 중간, 즉석 질문시간에 한 사람이 고민을 이야기하자, 다른 청중이 자신의 경험을 오픈하며 조언을 해주었고, 또 그 모습을 이영문 박사님이 칭찬, 격려해주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게 바로 동료 지원의 모습이고, 전문가와 국가의 따뜻한 시선이 아니겠는가? 이제는 이렇듯 공감과 공존하는 것이 꼭 필요한 시대이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생각은 국가의 정책과 예산이 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정책은 관심이다.

정신질환을 경험한 수많은 사람들, 편견에 속으로 눈물 흘리는 가족들, 이 아이를 어떻게 이 나라에 맡기고 죽나 하며 가슴을 치는 부모들.

이 글을 읽는 이 순간에도 40분에 1명 꼴로 자살하는 통계도 국가가 관심을 갖고 행동하지 않으면 이 지옥의 mood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아직도 정신지체와 정신장애를 구분도 못하고,

국가 지도자의 정신건강에 관심이 없고,

자살률 1위가 우리 집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생각을 가진,

지역사회의 정신건강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는 지역사회 지도자가 있다면.

이제는 그 사람의 정신건강을 의심해야 할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F코드의 진실'은,

이는 단지 질병의 분류기호일 뿐이라는 것이다.

백내장, 당뇨처럼.

 

실제로 정신질환은 다른 신체질환처럼 지속적으로 관리를 한다면 얼마든지 치료가 가능한 병이다.

질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 진실이다.

 

정신질환을 겪은 이들도 이제 자신의 목소리(voice)를 내고, 함께 회복의 길을 논의할 수 있는 그런 성숙한 사회가 되면 좋겠다.

비록 인생의 중도에 정신질환을 겪게 되더라도 네 삶이 불행해질 이유는 없다고, 천천히 살아가자고 손잡아주는 이웃이 있으면 좋겠다.

여전히 사람이 희망이라도, 다시 마을 공동체, 지역사회 공동체로 함께 가자고 말하는 리더가 많아지면 좋겠다.

국가가 이를 지원하는 정책과 예산으로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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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잎이 지는 날,

오늘도 열심히 기타 연습을 해본다.

손에 굳은살이 아직 안 박혀서인지

여전히 나에게

F코드는 어렵다.

 

그래도

서툴러도

소박한 일상의 노래를

매일 조금씩 연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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