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신경정신의학회 윤리위원장 임기영

 

윤리란 말만 들어도 거부감을 나타내는 이들이 있다. “진료하느라 하루하루 버티기 바쁜데 윤리니 뭐니 공자님 말씀하는 것을 들으면 화가 치민다”는 사람도 있고, “윤리강령이든 지침이든 결국엔 자승자박이고 부메랑”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글에서는 의사윤리가 왜 필요한지, 윤리강령이나 지침을 선언하고 준수하는 게 왜 환자들 뿐 아니라 우리 의사들에게도 이익이 되는지 설명해 보고자 한다.

 

우선 의료윤리와 의사윤리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생명윤리’, ‘의학윤리’, ‘의료윤리’ 등에서 말하는 윤리는 철학의 한 갈래이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주 중요하고, 어려운 상황에 마주했을 때 어떤 선택, 어떤 결정을 하는 것이 최선인지를 고민하는 학문이다. 지적장애가 있는 15세 소녀가 동네 불량배에게 성폭행을 당해 임신 5개월째이다. 이 태아를 낙태시키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그냥 출산하도록 하는 게 좋을지? 여호와의 증인 신자의 7살 된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수술 중 수혈이 시급한데 부모는 이를 거부한다. 수혈하지 않고 그냥 죽게 내버려두어야 하나, 부모의 뜻을 무시하고 수혈하여야 하나? 이런 딜레마 상황에서의 선택, 결정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의료윤리인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의사들은 평생 진료하면서 이와 같은 윤리적 딜레마에 직면하는 일이 매우 드물 것이다. 그리고 설사 있다 하드라도 윤리학자나 병원 윤리위원회에 자문을 구하거나 맡겨 해결하면 될 것이다. 아마도 이런 윤리를 두고 사람들은 흔히 공자님 말씀이라고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의사윤리’, ‘윤리강령’, ‘윤리지침’ 등에서 쓰이는 윤리는 전혀 다른 뜻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이때의 윤리는 역사적으로 잘못 선택된 용어이다. 1511년 영국 왕 헨리8세(Henry XIII)는 토머스 울지(Thomas Wolsey) 추기경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자격 없는 자들이 의술을 행함으로써 많은 국민이 피해를 당하고 있다. 교회가 책임지고 체계적인 시험을 통해 의사 면허를 관리하라.” 이에 따라 국왕의 주치의였던 토머스 리나크레(Thomas Linacre)는 국왕의 칙령을 받아 1518년에 왕립 의사협회(the Royal College of Physicians)를 창립하였다. 협회는 이후 면허시험을 실시하여 자격 있는 사람만 진료를 할 수 있도록 허가하였고, 면허 없이 진료하거나 진료 과오를 저지른 의사를 처벌하였다. 특히 면허시험은 라틴어로 된 갈렌(Galen)의 의학서를 암기해야만 답변 가능한 문제가 출제되었고, 자연히 대학교육을 받은 부유층이 아니면 면허시험을 통과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는 영국의 의사사회가 소위 신사(gentlemen)라고 불리는 상류 귀족 집단으로만 구성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편 왕립의사협회는 협회 규약을 어긴 회원들에게 다양한 종류의 벌금과 제재를 가했는데, 초기에는 이 규약을 벌칙(penal)이라고 불렀지만, 고귀한 신사들에게 벌칙이라는 용어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아서 1500년대 중반부터는 이를 윤리(ethics)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때의 윤리는 환자들에게 약 이름을 알려주면 안 된다든가, 대중 앞에서 동료의사를 비방하면 안 된다는 등 주로 협회와 협회 회원 의사들의 이익과 신분을 강화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철학의 한 분야인 윤리가 벌칙의 의미로 엉뚱하게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동안 정화되는 듯 하던 영국 의사 사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혼탁해지고 갈등이 심해졌다. 그 중에서 소속 내과 및 외과 의사들이 각각 진보당, 보수당으로 갈려 반목하고 파업까지 불사하던 맨체스터 자선병원의 이사회는 당시 존경받는 의사이자 사상가였던 토머스 퍼시벌(Thomas Percival)에게 “자선병원 의사들이 지켜야 할 행동지침(1792)”을 만들어 주길 부탁했고, 그 후 이 지침을 읽고 감명 받은 여러 의사들이 내용을 좀 더 보완하여 책으로 출판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결국 퍼시벌은 1803년에 『 Medical Ethics; or, a Code of Institutes and Precepts, Adapted to the Professional Conduct of Physicians and Surgeons 』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동로마제국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펴낸 로마법대전 중 Codex의 체제를 본 따서 편집하였는데, 이것이 윤리강령을 code of ethics라고 부르게 된 유래이다.

 

사진_ResearchGate

 

이 당시의 의사윤리는 기본적으로 의사 개개인의 고귀한 성품을 요구하는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의사는 신사로서 부드러우면서도 안정적이어야 하고 겸손하면서도 권위가 있어서 환자가 감사와 존경, 신뢰를 느낄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 병원의 이득보다 환자의 이득을 보호해주어야 하고 자선병원의 환자라도 값싼 약을 쓰지 않고 일반 환자와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 의사의 의무는 사회로부터 부여 받은 것이며 의사는 그들의 직업이 공공의 신뢰에 기반을 둔 것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따라서 윤리강령(code of ethics)보다는 예절 규정(rules of etiquette)이 더 적절한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동 시대 미국 의사들도 영국식 덕성 윤리(virtue ethics)의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황당한 것은 초창기 뉴욕 및 볼티모어 의사회의 윤리강령을 보면 고귀한 신사인 의사들이 불쌍한 환자들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 것인가 하는, 의사의 의무에 관한 조항은 2개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환자들이 지켜야 할 의무, 의사에 대한 환자의 예의를 강조한 조항들이었다. 그러다 의사윤리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1847년 5월 미국의사협회(AMA) 창립총회에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의사윤리강령이 채택된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정신(자유, 평등, 박애)에 강한 영향을 받은 일부 의료계의 지도자들이 기존의 퍼시벌 윤리강령에서 사회계층을 구분하는 용어들을 모두 삭제하고, 의사와 환자, 그리고 의사와 사회의 평등한 계약에 근거한 상호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새로운 윤리강령을 만들었다. 의사윤리가 과거의 성품 윤리(ethics of character), 덕성 윤리(virtue ethics)에서 행동 윤리(ethics of conduct), 전문직 윤리(professional ethics)로 혁명적 발전을 이룬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를 일으키는 데 사상적으로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미국 정신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저민 러시(Benjamin Rush)이다. AMA는 한 발 더 나아가 윤리강령을 강제하고, 비윤리적 회원들을 자율규제하기 위한 윤리사법위원회(ethical and judicial council)를 설치 운영하였다.

 

이에 대해 일부 의사들의 반발이 거셌다. 특히 뉴욕 주 의사협회를 중심으로 ‘1847년 윤리강령’에 대한 집요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도덕관념에 의해 판단될 이유가 없다”면서, 윤리강령은 고귀한 품성을 지닌 신사들인 의사에 대한 모욕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AMA가 이에 굴복하여 1903년 뉴올리언스 총회에서 윤리강령(code of ethics)이 원론적인 10가지 계명을 천명하고 의무가 아닌 권고로 위상이 낮아진 윤리원칙(principles of medical ethics)으로 대체되었다. 윤리사법위원회도 해체되었다. 그러나 규제의 기능이 없는 윤리원칙으로는 의사사회의 갈등이나 도덕적 문제,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적 신뢰의 추락과 최종적인 의사 사회의 위상 실추를 막을 수 없음을 곧바로 깨닫게 되었고, 결국 8년 만에 다시 윤리사법위원회의 부활, 윤리원칙의 재개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윤리강령은 의사 사회의 공격만 받은 게 아니었다. 여러 사회학자, 시민운동가 들이 의사윤리강령을 기본적으로 의사 집단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길드(guild) 규약이라고 규정하였다. 사회학자 제프리 벌란트(Jeffrey Berlant)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뢰 유발 장치 (trust inducing apparatus)로서의 윤리강령은 의료 서비스의 시장 가치를 증가시키고 이를 필수적 서비스로 승화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윤리강령은 또한 의사-환자 관계를 가부장적 온정주의(paternalism)의 관계로 정립시켜 놓았는데 이를 통해 의료서비스에 대한 소비자, 시민단체의 영향력을 성공적으로 무력화 시킬 수 있었다. 즉 일반대중을 취약한 개개인의 환자들로 분열시킴으로써 의사들은 단결된 소비자 집단으로서의 대중이 아닌 상호 고립된 개개인들을 상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윤리강령은 환자들에게 ‘의사 선생님이 나만은 구원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줌으로써 환자들 사이에 경쟁심을 유발시킨다. 그 결과 환자들은 자신과 의사 사이에 그 어느 누구도 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게 된다. 의사-환자 관계가 갖고 있는 정서적 힘의 상당 부분은 비용에 상관없이 의사가 자신의 생명만은 구해 줄 것이라는 환자들의 이러한 소망에 기인한다.”

 

실제로 정치적 윤리로서의 AMA 윤리강령은 의사의 사회적 지위 향상, 대중으로부터의 신뢰와 권위 획득, 그리고 수익증대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AMA 윤리강령은 일반 대중에게 의사는 과학자이고, 존귀한 신사이며, 책임감 있고 유능하다는 인상을 심어주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의사 사회는 국가나 시장의 통제가 아닌 의사들 스스로의 자율통제에 맡겨놓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확신을 갖도록 정부와 시민사회를 설득할 수 있었고, 실제로도 꾸준하고 강력한 자율 규제, 자율 징계를 통해 의사 사회의 윤리적 역량을 지속적으로 증명하여 왔다. 책이나 영화, 신문 등의 매체에서 미국의 의사들이 유럽을 포함한 세계 어느 나라 의사들보다 도덕적인 신사로 표현되고 있는 것 역시 윤리강령에 힘입은 바 크다.

 

이제 우리는 의사들로부터도 미움을 받고 있고, 소비자, 시민운동 하는 사람들로부터도 미움 받고 있는 대한민국의 의사윤리에 대해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의사 윤리가 환자들에게 이익이 될 뿐 아니라, 우리 의사들에게는 더더욱 큰 이득이 되는 것인지 이해하여야 한다.

 

윤리강령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자율규제는 우리 의사들이 전문직(profession)인지, 단순기술노동자인지를 가르는 핵심 요소이다. 윤리적 징계는 비윤리적 행위를 한 특정인을 징벌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 사람으로 인해 다른 회원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차단하는, 조직 전체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데브리망(debridement)이다.

 

정신의학의 창시자인 요한 라일(Johann Christian Reil)은 “정신과 의사에게는 통찰력, 관찰력, 지적 능력, 선한 의지, 끈기, 인내, 경험, 당당한 체격, 존경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표정이 요구되므로, 의사들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사람이 정신과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의사들 중에서 특히 우리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은 의사윤리의 수호와 실천에서 의사 사회 전체의 리더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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