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정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지난 15일 한 대학병원의 신규 간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이 죽음의 배경으로 간호사 내부의 ‘태움 문화’ 가 주목받으며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선배 간호사가 후배 간호사에게 과도한 질책 및 폭언을 해서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태움 문화’는 이번 사건 뿐 아니라, 과거에도 수차례 발생했던 간호사 자살이 배경으로 늘 지적되어왔다.

 

사진_픽사베이

 

아픈 이를 돌보는 것이 숙명인 간호사가 어떻게 환자에게는 백의의 천사이면서, 동시에 후배에게는 태움의 화신이 됐을까?

 

이런 역설적인 상황을 만든 것은 난폭한 성향의 간호사 개인이 아니다. 바로 의료 현장의 특수성, 국내 의료 현실, 그리고 폭력의 특성 이 세 가지 원인 때문이다.

 

당신은 직장 탕비실 또는 집 냉장고에 있는 음료수를 언제 개봉했는지 기억하는가? 만약 기억한다면 당신은 의료인이 될 자질이 충분하다. 왜냐하면 의료 현장에서의 작은 실수는 바로 인명 사고와 연결되기 때문에, 그런 작은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무실을 방문한 바이어에게 개봉한 지 24시간이 지난 음료수를 줘도 바이어는 죽지 않는다. 물론, 기분이 상해서 계약을 하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개봉한 지 24시간이 지난 지질 주사제를 깜빡하고 투여했다면, 환자는 죽을 수 있다.

 

사진_픽사베이

 

작은 실수가 인명 사고로 쉽게 이어진다는 점은, 모든 의료인을 작은 것 하나 하나에 강박적으로 집착하게 만든다. 만약 이런 것에 집착하지 않는 의료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곧 의료 소송에 휘말리게 되고 의료 현장을 떠나게 된다. 의료 현장이라는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작은 것에 강박적으로 집착해야만 한다. 두꺼운 가죽이 극한의 추위에서 북극곰을 생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의료 현장의 어려움은 간호사 자신이 담당한 환자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이 퇴근하고 난 뒤 근무를 할 간호사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인계해 줘야 한다. 이 과정은 인계를 해주는 쪽도, 인계를 받는 쪽도 엄청난 부담을 느낀다. 단 한 환자라도, 한 환자의 어떤 약 하나라도 잘못 전달되면 양쪽이 인명 사고에 대해 법적, 양심적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런 의료 현장의 특수성은 한없이 너그러운 사람도 지독하게 집착하는 옛 애인으로 쉽게 바꿔버리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어려움을 악화시키는 것은 바로 간호사 한 사람이 돌봐야 하는 환자 수가 터무니없이 많다는 점이다. 미국은 5.4명, 일본은 7명, 우리나라는 25~40명이다. (대한간호협회)

 

냉장고 안에 있는 음료수의 이름과 개봉일을 외워서 다음 사람에게 전달하면 되는 게임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하다. 만약 단 하나의 음료수라도 틀리게 되면 벌금을 낸다. 이 게임에서 미국인은 5개, 일본인은 7개 음료수의 이름과 개봉일만 외우면 된다. 그런데 한국인은 25개 음료수의 이름과 개봉일을 외우고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벌금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물론 월급은 더 적다.

 

이런 국내 현실이 환자가 있는 병실에서는 천사이던 간호사를, 병실 앞 스테이션에서 악마, 화신으로 변하게 한다. 의료 현장의 특수성과 더불어 국내 의료 현실이 간호사를 활활 타오르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태움’으로 유명한 특정 대형 병원이 있다. 또 같은 병원 내에서도 근무 부서에 따라 ‘태움’의 정도가 다르다. 이런 차이는 폭력의 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사진_픽사베이

 

폭력은 대물림 된다. 어려서 가정폭력을 당한 아이는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부모가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그 상황을 견디기 위해 부모를 이렇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내 부모는 나에게 관심은 가지고 있는데, 관심의 표현을 서툴게 하는구나.’

 

내가 절대적인 약자인 상황에서 폭력을 견디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설득하여 그 폭력을 미화하고, 합리화시키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제 정신으로는 그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인질들이 납치범을 걱정해주는 것과 비슷한 논리다. 신규 간호사였을 때 태움의 피해자가 성장해 태움의 가해자로 바뀌는 것은 이런 폭력의 특성 때문이다. 폭력이 미화되어 관심으로 기억되고, 자신이 받았던 관심을 신규 간호사에게 하사한다. 이렇게 폭력은 대물림되며,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이런 폭력의 특성을 현명하게 극복한 근무 부서와 폭력의 흐름에 휘말린 근무 부서의 태움의 정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태움’ 희생자가 나올 때마다 그 원인으로, 가해자 간호사 개인, 혹은 여자 비율이 높은 간호사 집단 특성이 지적되곤 한다. 이로 인해 현장에서 성실하게 근무하는 간호사들이 엉뚱하게 손가락질 받는 일이 생긴다. 사건의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면, 올바른 대책을 세울 수 없다. 그렇게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건이 반복되는 것을 이미 여러 번 지켜보지 않았는가.

 

사진_픽사베이

 

많은 언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간호사 집단의 자정을 통해, ‘태움’이 개선될 수는 있다.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원인 중에 폭력의 특성은 집단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호사 집단이 자정을 해도 국내 의료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국내 모든 의료 정책은 저비용으로 그럴 듯한 의료를 공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이 후려친 단가에 맞춰서 부품을 납품하기 위해서 하청업체는 인건비를 낮추고, 쉬는 시간도 없이 직원을 돌린다. 예민해진 직원들끼리 싸움이 일어난다면, 직원과 하청업체 사장, 대기업 관리자는 각각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을까. 또 엉망인 부품으로 만들어진 완제품을 구입하고, 피해를 본 소비자는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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