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그린나래미디어(주)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장 큰 주체는 '감정'이다.

'이성'의 범주에 딸린 주저리 주저리 많은 이론과 도덕적 의무, 그에 따른 설명들은 단지 이 '감정'을 잘 꾸미기 위한 변명에 불관한 것이 아닐까. (오직 삶에 대한 '관조'만이 이런 감정을 조금이나마 다스릴 수 있다.)

스윗 프랑세즈. 그대로 해석하면 프랑스 조곡이란 뜻이다. 조곡이란 몇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무곡을 말한다. 원작에서 작가는 전쟁 시 나타나는 인간의 본성을 여러 인간 부류의 이기적인 모습으로 그려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원작과는 조금 다른 맛을 보여준다.

영화는 1940년 세계 2차 대전, 독일군이 프랑스의 뷔시라는 작은 마을을 점령하면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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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전쟁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프랑스 여인 루실, 독일군 장교 브루노는 점령 기간 동안 루실의 저택에 머무르게 된다. (뻔히 보이는 결말을 향해, 감정선의 정리를 통한 영화의 전개는 잔잔함 가운데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여유가 되면 꼭 한 번 보길 바란다.) 루실은 아버지의 유산인 피아노를 소중히 다루는 브루노의 모습에 호감을 느끼지만 전쟁에 나간 남편에 대한 죄책감으로 다가가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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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실과 브루노의 사이를 막은 것은 죄책감이다. 전쟁터로 나간 남편에 대한 루실의 죄책감. 여자는 남편에 대한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 따위가 방패막이 된 것이 아니었다. 이는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면서 죄책감이 묻혀버린 후의 루실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관객 역시 정조와 정열의 가운데서 갈팡질팡하다 남편의 외도 소식을 들었을 때 머릿 속에 떠올린 것은 브루노와 루실이 서로 탐하는 장면이었으리라.

정당화 되어버린 죄책감. 브루노에 대한 호감은 남편에 대한 배신감, 분노,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한 행동에 대한 회의감과 함께 과감함으로 발전한다. 먼저 다가가서 브루노에게 깊은 키스를 하고, 집이 비어 있는 날에 브루노의 귀가를 기다린다.

브루노의 귀가를 기다리는 루실을 보며 관객은 설렘과 곧 다가올 파국을 예상하는 불안 사이에서 묘한 희열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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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관객이 바라는 극적인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잔인함이 없는 전쟁의 잔혹한 묘사, 극적임이 없는 끊임없는 긴장감은 이 영화의 놀라운 매력이다. 관객은 단지 상상만으로 이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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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이들 둘 사이를 막는 것은 루실의 수치심이다. 루실은 브루노의 귀가를 기다리는 모습을 이웃집 여인에게 들키게 된다. 이 여인의 남편은 독일군 장교를 죽이고 도망 중이다. 이 여인은 루실의 수치심을 자극한다. 루실은 독일 병사와 외도하는 다른 여인을 경멸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긴다. 루실은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이웃 여인의 남편을 구하는 데 앞장선다.

*'수치심'이란 '죄책감'에 비해 조금 더 미성숙한 감정이다. 수치심은 죄책감보다 더 깊은 내면을 자극해 자아상과 자존감을 상처입히고 자신과 세계를 의심하게 한다. 영화 속 루실의 행동을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죄책감은 루실이 원하는 행동을 억제할 뿐이었지만, 수치심은 한 단계 더 깊은 행동을 이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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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에게 다가가지 않았던 루실, 이웃 여인의 남편을 구하는 루실의 행동은 모두 도덕적 관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성'적인 것이었지만, 그 행동을 이끈 것은 그 이면의 '감정'이었다. 하지만 루실은 죄책감이나 수치심 등의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반동으로만 행동했을 뿐 그녀 자신이 감정의 주체가 되지는 못했다. 진정한 사랑을 한 이는 자기 스스로가 주체적인 사랑을 한, 오히려 일관된 사랑의 감정에 따라 행동한 브루노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역시 성숙하지 못한 인간이기에 순간의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이기에, 루실에게 더 잘 이입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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