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인기 웹툰 <며느라기>의 주인공, 사린은 얼마 전 결혼한 새내기 신부다. 명절에 시댁에 가게 되면 요리와 설거지를 도와주겠노라 굳건히 맹세하던 남편 구영은, 막상 시댁에서는 ‘당연히 명절 준비는 여성들이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시어머니 앞에서 사린의 눈치만 볼 뿐이다. 도와주는 이 없이 쓸쓸히 전을 부치고, 설거지를 마친 후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차창 밖을 멍하니 응시하던 사린은 구영에게 투정을 부려 보지만,
 

“그렇게 하기 싫었으면 못 한다고 하지 그랬어!”

 

라는 말로 응수하는 구영의 말에 할 말을 잃는다. 공감이 결핍된 말 한마디는 필연적으로 다툼을 불러오고, 둘은 마음을 굳게 닫아버린다. 이른바 공감의 실패(empathic failure)다.

 

사진_픽사베이

 

설 명절이 기쁘지만은 않은 사람들

 

설 명절에는 각지에 흩어져 있던 혈육들이 지루한 귀성길도 마다하지 않고 가족들의 정을 느끼기 위해 고향을 향한다. 푸짐한 음식들을 앞에 두고 오랜만에 풀어놓는 가족들의 근황, 귀여운 아이들의 재롱으로 웃음꽃이 끊이지 않지만 이런 행복한 장면 뒤에도 마음이 편치 않은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에게는, 명절 연휴는 더 이상 휴일(holiday)의 느낌이 아닌 몸과 마음의 피로감이 쌓이는 괴로운 시간일 뿐이다.

 

우리나라의 문화가 유교적인 관습에서 많이 벗어나 서구화되어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대가족이 모이는 명절의 그림이 크게 변하지는 않은 것 같다. 누군가는 가족들과 모여 즐겁게 회포를 풀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그 뒷받침을 하느라 쉬지 못하고 집안일을 해야 한다. 이런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장면에서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또한 가족들 간에 서로의 근황을 물으면서 무심코 던지는 말들이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형제-자매 간, 시댁과 며느리 간, 처가와 남편 간에 쌓여 왔던 부정적 감정에 불을 댕기는 일이 생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소위 ‘명절 증후군’은 그렇게 생겨난다. 가족 간의 사랑을 느끼며 행복해야 할 명절이, 그 누군가에게는 안타깝게도 불편한 가시방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들이 얼굴을 붉히는 이유

 

2017년 초 536명의 기혼남녀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을 점수화했을 때 명절 스트레스 점수는 32.4점으로 ‘1만 달러 (약 1200만원 가량)이상의 부채(31점)’ 가 있을 경우의 스트레스와 ‘부부싸움 횟수가 증가할 때(35점)’의 스트레스 상황 사이에 위치했다. 명절 시기를 겪는 것이 부부싸움을 할 때의 스트레스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명절 전후의 예민한 시기는 부부 사이도 비껴갈 수 없다. ‘시월드’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것이 편치만은 않은 아내, 그리고 그런 아내의 마음을 무심하게 넘겨버리는 남편의 모습은 브라운관에서 자주 등장하는 부부 갈등의 진부한 클리셰지만 실제로 흔한 다툼의 원인이 된다. 연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쉬지 못하고 집중적인 가사노동을 해도, 그에 대한 감사의 인사도 받지 못하는 며느리들에게 명절의 ‘시월드’는 끔찍한 장소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아내의 불편한 마음을 의식하는 남편의 복잡한 심경이, 아내의 볼멘소리에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미숙한 남 탓(투사, projection)으로 바뀐다. 서로에게 불편했던 마음은 복잡한 귀향길에서 일시에 터져 나오곤 한다. 결국 긴 연휴의 끝이 싸움으로 끝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렇게 촉발된 갈등은 점차 커져 부부 관계뿐만이 아닌 가족들 간의 관계 분열의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명절에 보이는 갈등 중 대부분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일시적인 ‘공감의 실패 (empathic failure)’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명절 동안의 긴 이동 시간과 종일 끝나지 않는 일들의 피로감은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인척들의 무심한 오지랖은 부부의 기분을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부부가 평소 덮어 놓았던 갈등을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심신의 피로는 체내의 스트레스 체계를 작동시킨다. 피로감, 에너지의 고갈을 개체의 생존과 직결된 위험신호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뇌의 깊숙한 곳에 자리한 피질하 영역(subcortical area)이 담당하던 감정회로가 활성화되고 결국 상대를 헤아리고 조율하는 역할을 하던 대뇌 피질(cerebral cortex)의 기능을 덮어버린다. 이성과 합리적 사고보다는 감정과 충동이 전면에 드러난다. 명절처럼 스트레스가 가득한 힘든 시기에 평소에 서로를 잘 이해하던 부부들에게도, 서로에 대한 공감과 조율은 더욱 요원할 뿐이다.

 

사진_픽사베이

 

부부가 현명하게 명절 증후군을 극복하는 방법

 

일 년 중 며칠 되지 않는 명절이지만, 그 시기를 현명하게 견뎌내지 못하면 후유증은 서로의 마음에 오랜 상처를 남길 수 있다. 그렇다면 명절 증후군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1) 평소보다 한 템포 느리게 반응하자

긴장되는 순간들이 지나고 나면 서로에게 볼멘소리가 충분히 나올 법하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상대에게 나 또한 방어적으로, 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된다면 그 끝은 분명 좋지 않을 것이다. 상대가 내보이는 감정에 똑같이 감정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이전보다 한두 템포 늦추어 배우자의 입장에서 겪었을 오늘 하루의 결을 짐작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평상시보다 더 큰 스트레스에 직면한 이에게는 평소보다 더 큰 위안과 여유가 필요한 법이다. 

 

2) 서로의 입장이 다를 수 있음에 대한 공감이 필요하다.

부부의 삶이란, 전혀 다른 문화의 사람들이 만나 한 보금자리에서 좌충우돌하며 적응해나가는 과정이다. 서로에게 겨우 적응이 된 부부도 명절을 맞이하게 되면, 각자의 집에서는 결혼 전의 모습으로 일시적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각자가 결혼 이전 살던 보금자리가 자신에게는 더없이 편한 장소이지만, 상대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익숙하고도 당연한 가족들의 말과 행동이 상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필요하다. ‘우리 집안 사람들이 원래 그런 것' 이라는 말은 공감의 단절을 불러올 뿐이다. 종일 부엌에서 일한 아내의 몸과 마음이 불편할 수 있음을, 긴 시간을 운전해 온 남편의 몸과 마음 또한 그러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3) 예상되는 해묵은 문제들을 미리 정리하자

어떤 이들에게는 명절이 해묵은 감정이 폭발하는 기간일 수 있다. 결혼 이후 생긴 문제들의 원인이 고부 간의 갈등, 장서 간의 갈등이라면 더욱 그렇다. 명절 때마다 반복되는 문제가 있는가? 늘 같은 문제로 부부가 다투었던 것은 아닐까?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면, 이제는 조금은 거리를 두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노트에 해묵은 문제들을 정리해 보도록 하자. 그리고 반복되는 문제에 대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대처를 생각해 보자. 다만, 문제유발자들의 태도나 스트레스 상황이 저절로 바뀌기를 바라기보다는, 부부가 문제를 받아들이고, ‘부부가 할 수 있는 부분에 한해서’ 적절한 수위에서 대처하는 세세한 부분을 미리 논의할 필요가 있다. 감정적인 문제들을 차분히 손으로 적어보고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습관은 통제되지 않던 우뇌 피질하 영역에 합리와 이성의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한다.  

 

4) 그래도 할 이야기는 하자 (feat. 타임아웃) 

힘든 감정을 조절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자기주장’이다. 감정은 억압하고 누르고 있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표현되지 못한 무의식적인 화, 슬픔, 초조감 등은 신체의 불편감을 동반하며, 결국 극단적인 행동의 변화를 야기한다. 그러므로, 극단적인 상황이 되기 전에 대화와 표현을 통해 미리 감정의 압력을 줄일 필요가 있다. 

건강한 감정 표현을 위해서는 온건하고 편안한 분위기의 대화의 장이 필요하다. 스트레스 상황 직후와 같은 예민한 시기나, 타인의 시선이 의식되는 곳보다는 차분한 음악이 흐르는 카페나 차 안과 같은 부부가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하자. 감정 표현을 받아줄 수 있는 상대방의 역할도 중요하다. ‘그렇지’, ‘그럴 수 있었겠네’ 와 같은 맞장구와,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등의 비언어적 표현 또한 상대의 건강한 감정표현을 돕는다. 상대방에게 충분히 공감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언어적, 비언어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대화 도중 감정이 격앙될 수 있다. 언성이 높아지는 시기가 오면, 어느 한 쪽이 ‘타임아웃(time-out)’을 외치도록 하자. 대화나 의사소통보다는 잠시동안 차분한 음악을 듣거나, 따뜻한 차를 마시며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이다. 인간의 감정은 파도와 같다. 온전히 감정을 인식한 후 가만히 지켜보면, 정점에 달한 파도가 다시 잔잔한 물결이 되듯이 감정이 가라앉게 된다. 물론, 이러한 타임아웃의 상황과 시간, 대화 재개의 시점에 대해서는 미리 충분한 논의와 약속,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약속된 시점에 적절하게 고조된 분위기를 끊어주는 것 또한 건강한 대화를 지속할 수 있게 하는 요인이다.

 

 

사진_픽사베이

 

작은 것에 대한 인정과 공감에서부터 시작하자

명절은 짧게 지나가는 이벤트일 뿐이다. 일시적인 스트레스 상황에서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보다는, 힘들었던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충분히 공감하고, 보듬어주려는 노력이 짧은 위기를 극복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명절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알아가고 위기를 헤쳐나가는 법을 배우는 ‘실전연습’ 이라고 여기자. 위기를 극복한 부부는 분명 한 단계 더 성숙할 수 있다. 

 

 

*참고자료
1) 웹툰 <며느라기>, 수신지
2) “황금연휴 며느리들은 괴롭다” 명절 증후군 환자 증가, 2017. 9. 30.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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