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주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 중에서 분노(anger)만큼 표현의 스펙트럼이 폭넓은 감정을 쉽게 찾기는 어렵습니다. 지난 번 연재 글에 이어서 이번에도 분노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사이코드라마에서 어떻게 다루는지를 함께 이야기해보자 합니다.

 

사진_픽사베이

 

분노의 표현은 문화적 영향을 아주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유교(儒敎)사상이 아직도 관습적으로 많이 남아있는 국가에서는 분노의 표현이 마치 ‘잘못’ 또는 ‘죄악’으로 느껴지도록 가정 또는 학교에서 교육받아왔습니다. 그래서 화를 내기보다는 화를 참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훈육 받아온 결과로, ‘화병’이라는 동양에서도 한중일 세 나라,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화병을 지닌 분들을 진료실에서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체면’이라는 매우 한국적(?)인 문화가 강력하게 우리의 의식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분노의 표현은 자연스레 억압되며 이는 또 하나 화병의 강력한 원인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이코드라마를 진행하다보면, 이러한 문제로 고민에 빠져있는 분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너무나 억울하고 화가 나는 상황이 주인공에게 발생했는데, 주인공은 너무나도 침착한 말과 태도로 상대방을 대합니다. 물론 얼굴 표정과 굳어진 자세에서 주인공의 심리 상태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인 주인공은 ‘늘 익숙했던 태도’로 부정적인 감정, 아니 분노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대상을 향해 매우 점잖은 말투로 대화를 이어갑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 고함을 질러도 시원치 않을 것 같은데, 기어가는 목소리로 마치 애원하듯이 상대방에게 말합니다. “엄...마, 미워요...”

 

지난 글에서는 사이코드라마 디렉터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서 주인공의 내면의 소리를 대신 전달하고 주인공을 지지하는 방법인 디렉터 더블(director double)의 방법을 주로 사용한 분노의 표현 방식을 다루었다면, 이번 글에서는 좀 더 행위(action) 중심의 기법들을 이용한 분노의 표현과 해소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얼마 전에 시행된 사이코드라마에서, 직장 상사로부터 모욕과 푸대접을 수년간 받아온 분이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이유로 트집을 잡고, 주인공인 50대 여성 주인공을 힘들게 합니다. 이런 장면에서도 안타깝게 주인공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오히려 자신을 변명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사진_픽사베이

 

이러한 상황에서 디렉터는 주인공의 위축된 자아를 신장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요청을 하였습니다. 주인공에게 의자를 가져와서 그 위로 올라가서 서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직장 상사가 마주보고 서있습니다. 이제 주인공은 ‘높은 위치’에 올라와있고, 직장 상사를 ‘내려다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법을 ‘높은 의자(high chair)’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높은 의자’기법을 매우 단순하지만 주인공에게 강력한 지지와 함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당신이 더 높아졌습니다, 이제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의자에 올라가서 ‘내 눈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상사)’을 대하다보면, 자연스레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주눅 들었던 얼굴 표정이 조금씩 펴집니다.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야!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앞서 기어들어가던 목소리에서 이제는 호통 치는 마치 상사와 부하가 서로 역할이 바뀐 듯한 태도로 주인공이 변해갔습니다. 심리적인 위치(높이)를 상징적으로 수정하여, 주인공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깨달아가는 과정이 자연스레 진행됩니다. 자신의 감정(분노)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자기 탓만 하며 힘겨워하던 주인공이 드디어 '남 탓'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주인공이 만족할 수 없다면, 좀 더 극적인 사이코드라마의 잉여현실(surplus reality) 작업을 추가해서 장면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새롭게 추가된 장면은 그 상사가 직장의 최고 우두머리인 사장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사장님은 주인공의 편이 되어서 상사를 질책하고 야단칩니다. 주인공은 그냥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납니다. 어부지리라는 말이 어울리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사이코드라마의 진정한 효과를 느끼기엔 부족합니다. 이제 디렉터는 주인공에게 ‘사장님과 역할 바꾸기(role reversal)’를 요청합니다. 사장님과 역할을 바꾼, 즉 사장님이 된 주인공은 이제 ‘부하직원’이 된 ‘직장 상사’를 마음껏 꾸짖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법은 ‘자책감이 많고 타인을 의식하는 초자아(superego)’를 지닌 주인공이 부담감을 줄이고 ‘흥겹게’ 타인을 책망하고 분노를 표현할 수 있게 해줍니다.

 

사진_픽사베이

 

분노의 쌓임은 수많은 질환의 원인으로 작용됩니다. 적절한 분노의 표현이야말로 정신 건강뿐만 아니라, 신체 건강까지 보호하고 질환을 예방하는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사이코드라마는 지나치게 굳어버린 그래서 탄력성을 잃어버린 자아 기능에 회복 능력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사이코드라마의 놀이적이며 연극적인 특성이 이러한 자아의 역기능적 태도를 스스로 자연스레 인식하고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억압하고 표현하기를 주저하는 우리나라의 문화에서 사이코드라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마치 우리 민속 ‘탈춤’의 한 장면처럼, 탈(역할)을 쓰고 마음껏 양반을 비웃는 그 해학을 사이코드라마에서도 맛볼 수 있습니다.

 

사이코드라마는 역할놀이(role-playing)를 통하여 낯선 역할을 경험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합니다. 20세기 초반 기계화의 흐름 속에서 매너리즘에 빠진 도시인들에게 자발성의 증진을 통한 삶의 회복을 꿈꾸었던 모레노(Moreno)의 외침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공연 안내

사이코드라마 힐링 金曜 공연

시간 : 매월 2/4주 금요일 오후7시30분 – 10시

장소 : 한국에니어드라마연구원(서울시 중구 신당동 309-45 승리빌딩 3층)

문의 : gowho21@naver.com / 010-7544-9150

블로그 : 에니어드라마 http://blog.naver.com/gowho21 안내문 참조.

 

교육 안내

‘임상 사이코드라마 디렉터’ 교육과정의 교육생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2018년 3월 개강으로 절찬리에 진행 중입니다.

사이코드라마 디렉터로 훈련받고자 원하시는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합니다.

주최 : 한국임상사이코드라마연구소

문의 : gowho21@naver.com / 010-7544-9150

블로그 : 에니어드라마 http://blog.naver.com/gowho21 안내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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