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아>: 저스틴의 ‘낭만적 우울’과 클레어의 ‘평범한 우울’에 대하여

사진 익스트림필름

예술은 그 소재로 단연코 비범(非凡)한 자를 편애한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은 이 비범한 자를 돋보이게 하는 도구로 종종 이용된다.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의 비범함이 드러날 수 있었던 것에는, 그 천재성을 질투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의 자유분방함(그러나 그것은 타인에 대한 무례와 오만으로 자주 이어진다)에 속절없이 무력한 살리에리가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아마데우스>가 천재, 즉 비범한 재능을 가진 자와 그를 질투한 평범한 재능을 가진 자에 대한 대표적 영화라면,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는 ‘비범한’ 우울을 겪는 자와 ‘평범한’ 우울을 겪는 자의 이야기이다.

클레어(샤를로뜨 갱스부르)는 갑부 남편과 함께, 자신의 동생 저스틴(커스틴 던스트)의 결혼식을 화려하고 성대하게 열어준다. 저스틴은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아온 것으로 보이며, 이 사실을 아는 클레어는 저스틴이 `돌출 행동'을 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해 한다. 저스틴은 피로연 자리를 떠나 갑자기 목욕을 하거나 정원에 소변을 보는 등의 기행을 하다가 결국 결혼식 막바지에 이르러 처음 본 남자와 성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결혼식은 엉망이 된다.

우울증이 심해진 저스틴은 클레어의 집에서 머무는데, 그 즈음 `멜랑콜리아‘라는 이름의 행성이 지구로 점점 다가와 클레어는 멸망에 대한 공포로 초조해 하나, 그럴수록 저스틴은 묘하게 기운을 차려가며 대수롭지 않은 듯 행동한다. 과연 `멜랑콜리아'는 지구와 충돌하게 될까. (결말은 영화에서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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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저스틴을 비범한 자로 만드는, ‘그녀의’ 우울증을 먼저 살펴보자. 영화 속 저스틴의 우울증은, 오늘날 정신의학에서 우울을 일컬을 때 사용되는 디프레션(depression)이라는 단어보다는, 멜랑콜리아(melancholia)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Depression과 melancholia의 차이는 무엇인가.

멜랑콜리아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에 존재했던 4체액설과 관련되어 있다. 당시에는 흑(melan)담즙(cholé)이 인간의 네 가지 체액의 균형을 깨고 우위를 차지하면서 슬프고 무기력한 상태가 된다고 믿었다. 중세 때까지 주로 부정적인 묘사로 사용되던 멜랑콜리아 개념은, 그러나 르네상스 시기부터는 낭만적 의미를 부여받기 시작한다.

이 시기부터 예술가 또는 천재 지식인에게는 거의 반드시 ‘멜랑콜리함’이 수반되는 것처럼 표현되었고, 서양의 다양한 예술작품들에 이러한 인식이 반영되었다. 멜랑콜리에 부여된 낭만화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서양 문화에서는 창조성의 원천으로서의 침울함을 멜랑콜리로 표현한다. 수잔 손택이 자신의 저서<은유로서의 질병>에서, “멜랑콜리아(melancholia)에서 그 매력을 뺀 것이 우울(depression)"이라고 표현한 것은, 서양 문화에서 멜랑콜리아에 부여한 이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에서의 저스틴은 우울증 중에서도 바로 이 ‘멜랑콜리아’로서의 우울증을 가지고 있다. 달빛이 비치는 고저택을 배경으로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비현실적으로 매력적이다. 또한 그녀는 영화에서 마술적인 예지력을 가진 것으로도 묘사되며, 이는 그녀의 우울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녀는 행성이 다가오는 것을 예언하고, 커다란 병에 가득 담긴 콩의 개수를 알아맞히는 게임에서 세어보지도 않고 개수를 정확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depression은 언제부터 주로 사용되었는가. 근대 정신의학에 이르러 depression은 의학적 의미로서의 우울을 뜻하는 단어로 쓰이기 시작했다. (현대 의학에서 melancholia라는 용어는 우울증의 특정 양상을 나타내는 단어로 남아있기는 하나, 이것은 앞서 언급한 ‘예술적 의미’의 melancholia와 같은 뜻은 아니다.)

라스 폰 트리에는 저스틴을 묘사함에 있어서, 우울증(depression)에 예술적 의미(매력과 천재성)의 멜랑콜리아를 추가로 끼얹었다. 이것이 그가 저스틴을 비범한 자로 드러낸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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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의외로, 라스 폰 트리에는 비범한 자(저스틴)와 평범한 자(클레어)에게 영화를 공정하게 배분했다. 영화는 두 개의 파트로 나뉘어져 있고, <파트 1>의 제목은 ‘저스틴’, <파트 2>의 제목은 ‘클레어’인데, 두 파트에 배당된 시간은 정확히 61분씩이다. 이것이, 치밀하기로 유명한 감독이 사실은 두 인물에게 대등한 비중을 싣고 있다는 근거 중 하나다.

<파트 1>은 결혼식장을 엉망으로 만드는 ‘멜랑콜리아’ 상태의 저스틴을 보여주고, <파트 2>는 몸도 가누지 못하는 저스틴을 극진히 보살피는 한편으로 행성 ‘멜랑콜리아’가 다가오는 것에 지극히 ‘인간적인 우울’로써 반응하는 클레어를 보여준다. 영화에서 짐작되는 클레어의 기질은 사실 저스틴만큼이나 어둡지만 그녀는 저스틴과 달리 시종일관 타인의 눈치를 보고, 저스틴의 일거수 일투족에 불안해하고, 행성이 다가오는 것을 예감하며 우울해한다.

예술이 등장인물에 부여하는 낭만성의 총량 중 대부분은 저스틴이 가져갔으며, 클레어에게는 그 낭만성이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그런데 그렇기에, 모든 것이 낭만(우울증 중에서도 ‘매력적이고 천재적인’ 우울증을 앓는 저스틴, 화려하면서 고요하고 고립된 저택 등)과 비현실(행성의 충돌)로 꽉 차있는 영화의 분위기에서, 클레어는 가장 ‘우리’의 현실에 가까운 인물로 남게 된다. 그것이 라스 폰 트리에가 ‘평범한’ 클레어를 부각하는 방식이다.

모든 것이 비범함으로 가득한 가운데, 클레어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으로 존재한다. 저스틴을 원망했다가도 다시 불쌍히 여기면서 언니로서 보살피는 양가적인 행동, 죽음 앞에서 의연함과는 거리가 먼 채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언짢을까 염려하는 태도. 그것이 줄곧 비현실적인 느낌의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현실과 맞닿는 지점인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행성 충돌을 예감하며 불안과 우울이 뒤섞인 모습이 클레어에게 드러나는데, 이것이 오히려 현실의 우울증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멜랑콜리아>에서 클레어의 존재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를 보았을 때처럼, 매력과 천재성이 끼얹어진 멜랑콜리아 상태의 저스틴이나, 한 세기에 몇 명 나올까 말까한 신동 모차르트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묘한 위로가 된다. 죽음 앞에 가장 정직하게 불안해하고, 낭만이 제거된 날 것의 우울함을 드러내는 클레어와, 자기 재능의 한계에 좌절하고, 내면의 추한 욕심과 질투심을 감추지 못하는 살리에리.

이것이 바로, 예술이 평범한 자를 통해 비범한 자를 드러내는 방식이자, 다시 비범한 자를 통해 평범한 자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행성 ‘멜랑콜리아’가 결국 지구와 충돌하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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