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주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이코드라마는 만남의 무대입니다.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 자리 모여서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즉흥적인’ 역할놀이(role playing)를 통하여 이루지기 때문에 사이코드라마는 집단(group)을 대상으로 하는 치료이자 연극이라는 독특한 특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이코드라마는 집단을 대상으로 진행되지만, 그 안에서 주인공(protagonist)을 선정하고 그 사람의 개인적인 삶을 함께 들어다보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공감과 나눔이 자연스레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주인공이 이야기하는, 즉 행위화하는 내용은 사이코드라마의 매우 중요한 요소이면서 그 내용에 따라서 사이코드라마의 전개 과정이 달라지게 됩니다.

 

사이코드라마의 주인공들이 표현하는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자주 반복되는 중요한 테마를 몇 가지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돌아가신 분을 잊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주인공을 사이코드라마에서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보통 ‘애도(哀悼)’라고 부르는 과정으로 ‘의미 있는 애정 대상(object)을 상실(loss)한 후에 따라오는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는 정신과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정신분석적으로는 ‘mourning’이라고 부릅니다.

 

사진_픽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死別)이 주는 슬픔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특히 준비되지 않은, 예상치 못한 이별을 경험하게 될 때, 그 충격과 고통은 오랜 기간 남아서 후유증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 사별의 충격을 감내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그리 녹록지는 않습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우울증에 빠지고 그 헤어짐을 인정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에게 사이코드라마는 강력한 치유력을 가진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사이코드라마의 가장 큰 특징들 중 하나인 잉여현실(surplus reality)을 잘 활용하면, 주인공이 자신의 기나긴 고통을 끝내고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소중한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습니다.

 

사이코드라마에서 만나는 이러한 주인공들은 대부분 병적(病的)인 애도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돌아가신 분을 잊지 못하고 죄책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당연히 우울감과 무기력은 함께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주인공을 사이코드라마 무대에서 만나면 디렉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최우선으로 고려해야할 사항은 당일 주인공의 신체적 그리고 심리적 컨디션입니다. 지나치게 우울하고 무기력해있다면, 아쉽게도 사이코드라마의 진행과정을 온전히 수행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하게도 다소 힘이 남아있고, 사이코드라마를 통하여 자신의 고통을 해결하고 싶은 욕구, 즉 행위 갈망(action hunger)이 있다면 사이코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실 수 있습니다.

 

사이코드라마 디렉터로서 극의 목표와 진행 방향은 명확합니다. 주인공의 ‘정지된’ 애도를 촉진시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돌아가신 분과의 남아있는 숙제-죄책감, 분노감 등-를 무대(stage)에서 해결하고 고인(故人)을 다시 하늘나라로 돌려보내 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 사이코드라마의 진행에서는 이처럼 간단하게 풀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 하에서 차근차근 주인공과 작업해나간다면, 원하는 결과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사진_픽셀

 

제가 사이코드라마에서 경험한 사례를 요약해서 설명해드리면 아마 좀 더 쉽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40대 후반의 여성이 주인공으로 올라오셨습니다. 그녀는 수년전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통을 받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제대로 지켜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우선적으로 느껴지는 주인공이셨습니다.

 

사이코드라마는 아주 천천히 진행되었습니다. 주인공과의 다소 긴 인터뷰 후에, 아버지와의 생전(生前) 장면, 즉 과거 상황의 재연(play-back)으로 본극이 시작되었습니다. 만성 신부전으로 주기적으로 투석하시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무대 위에 그려졌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다소 짜증스런 태도로 어머니와 전화(대화)를 합니다. 남편 간병에 지쳐있는 어머니와 그 상황을 역시 힘들어하며 지켜보는 주인공의 상황이 매우 안쓰러웠습니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었고, 갑작스럽게 쓰러지신 아버지가 누워계신 중환자실로 상황이 옮겨갔습니다. 중환자실 앞에서 안타까워하면서 발만 동동 구르던 주인공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갑작스레 쓰러진 아버지는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서 그렇게 임종하셨습니다. 즉 유언(遺言) 한마디도 못 남기시고 주인공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여기까지 진행된 상황에서 디렉터로서 알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주인공의 마음에 남아있는 죄책감과 분노감이었습니다. 장면 사이에 진행된 주인공과의 대화에서 알게 된 내용으로, 주인공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큰 원망의 대상이셨습니다. 형제자매가 여럿이었지만, 아버지의 간병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주인공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도 의무적으로 연락만 주고받았을 뿐 실제로 아버지의 투병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적은 안타깝게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기치 못한 아버지의 죽음은 주인공에 크나큰 죄책감을 남겨주었습니다.

 

이제 다시 드라마로 돌아갑니다. 주인공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부채인 ‘죄책감’을 해결하기 위하여, 잉여현실(surplus reality)장면으로 들어갔습니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상황으로, 주인공이 아버지의 죽음 직전 상황으로 들어갔습니다. 즉 중환자실에서 잠시 의식을 회복한 아버지와 주인공이 만나는 장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잠시 의식을 회복한 아버지와 딸(주인공)은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딸은 아버지에게 울먹이면서 죄송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딸을 다독이었고 오히려 딸을 위로하였습니다. 아마도 이런 모습이 보편적인 부녀지간의 상(像)이 아닐까요?

 

아버지의 급작스런 죽음 앞에서 크나큰 죄책감이란 부채를 짊어졌던 주인공이 비록 잉여현실이지만, 아버지를 만나서 마음을 나누고 위로를 받는 소중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한 번의 사이코드라마로 그간의 모든 짐들을 내려놓을 수는 없지만, 주인공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일종의 터닝 포인트를 제공해줄 수 있습니다.

 

사진_픽셀

 

사이코드라마는 역할놀이(role-playing)라는 매우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기존의 대화 위주의 치료법과 차별화되는 사이코드라마만의 요소입니다. 주인공이 극에 자연스레 몰입하면, 비록 실제 인물이 아닐지라도 극중에서 만나는 인물에게 주인공은 자신의 내적 세계를 투사(projection)합니다. 이는 치료실에서 만나서 정신치료자(psychotherapist)에게 자신의 내면을 투사하는 전이(transference)보다 훨씬 강력하며 보다 구체적입니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즉 ‘놀이하는 인간’의 의미를 사이코드라마에서 실질적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행위(action)를 통해 인지하고 통찰하는 작업은 ‘몰입의 놀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정지된 애도가 다시 시작되는 놀람(surprise)의 순간을 사이코드라마는 넉넉히 포용할 수 있습니다. 역할을 받고(role-taking), 역할을 수행하며(role-playing) 역할을 창조(role-creation)합니다. 고정된 과거를 수용하고 현재에서 변화시키면, 새로운 미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이코드라마는 충분합니다(psychodrama is enough).

 

 

필자 약력

임상 사이코드라마 수퍼바이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솔빛정신건강의학과의원 및 한국에니어드라마연구원 원장

한국임상예술학회 회장 및 한국임상사이코드라마연구소 대표

은평구민과 함께 하는 심리극 月刊 공연 ' 나를 찾아떠나는 여행' 연출

前'심리극회 거울과 가면' 및 'ACT심리극연구소' 대표

EBS '가족이 달라졌어요', MBC '사주후愛', 한국직업방송 '新 직업의 발견' 등 다수

 

공연 안내

사이코드라마 힐링 金曜 공연

시간 : 매월 2/4주 금요일 오후7시30분 – 10시

장소 : 한국에니어드라마연구원(서울시 중구 신당동 309-45 승리빌딩 3층)

문의 : gowho21@naver.com / 010-7544-9150

블로그 : 에니어드라마 http://blog.naver.com/gowho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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