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 픽사베이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불독에도 비유될 만큼 강인하고 고집 센 평소의 이미지와는 달리, 오랜 세월을 만성 우울증으로 인한 우울감과 자괴감, 자책감에 시달려 왔다. 지긋지긋하게 자신을 괴롭혀온 우울증을 가리켜 ‘검은 개’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 처칠은 “나는 평생 동안 검은 개 한 마리와 함께 살아왔다”라며 고백하기도 했다.
이를 빗대어 지금도 영미권에선 ‘우울하다’, ‘침울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의 ‘under the black dog’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고 한다. 검은 개(black dog)는 우울감의 대명사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처럼 우울감을 객체화하여 부르는 방법이 오히려 환자들에게는 우울증으로 인한 괴로움을 한결 덜 수 있는 한 가지 팁이 되어주기도 한다.

우울감이 환자들을 괴롭게 하는 가장 큰 방법 중의 하나는 부적절하고 과도한 자책감을 무럭무럭 키워주는 것이다. 우울감은 환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나는 패배자다’ ‘나는 실패했다’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와 같은 부정적 사고를 끊임없이 머리 속에 떠올리게 한다. 이와 같은 부정적 사고는 부정적인 인지왜곡을 일으키며 무슨 일을 하건 ‘나는 안 될 것이다’ ‘좋은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결코 행복해지지 못할 것이다’로 이어지는 우울감의 자기증식을 야기한다.
우울증은 부정적이고 우울한 인식의 세계관을 환자의 자아(self)에 덧칠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동일시는 환자들을 그저 ‘우울한 사람’에서 더 나아가 ‘실패한 사람’이라는 깊은 수렁으로 더욱더 빠져들게 한다.

우울증의 인지행동치료(Cognitive behavior therapy) 일환으로, 이와 같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우울증을 병적인 요소로서 객관화하기 위해 '괴물 석상(Gargoyle)'의 비유를 활용하기도 한다. 마이클 오토(Otto, 2000)가 제시한 이 방법은 우울증으로 인한 인지왜곡을 환자의 어깨 위에 앉은 가상의 괴물 석상으로 비유하는 것이다. 우울해질 때마다 오른쪽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며 내려앉는 괴물석상-가고일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아침에 침대 위에서 일어나려고 해도 이 석상은 내 어깨를 내리깔며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일을 하거나 집중을 하려 해도 한 발짝 움직이기가 힘든 건 어깨에 이 무거운 돌덩이가 얹어져 있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하게 생긴 육중하고 기괴한 이 석상은 조금만 일이 잘못되거나 내가 실수를 저질러도 ‘거봐. 무슨 일을 해도 안 풀리잖아. 이미 실패한 거야. 니가 다 망쳐 놓은거야’라며 원망과 저주의 말을 귀에 속삭인다.
그저 어깨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일상을 힘들고 무겁게 만든다. 심지어 우울증을 치료하거나 극복하려는 시도에도 석상은 돌덩이 입을 달싹이며 "치료는 돈 낭비, 시간 낭비일 뿐이야, 필요 없어"라며 속삭인다.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장면을 묘사한 것 같지만, 환자들이 느끼는 절망감, 우울감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표현해 주면 놀랍게도 환자들은 실제로 한결 가벼움을 느끼곤 한다. ‘나’라는 실패한 인간의 한심한 근성이라고만 생각했던 무의욕, 좌절감, 죄책감을, 괴물 석상이라는 객체화된 대상에 투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상적인 사건과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왜곡하여 받아들이던 스스로의 부정적 사고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고 말이다.

처칠이 스스로의 우울감을 검은 개로 빗대어 부른 것은 단순히 만성 우울증에 시달리는 본인에 대한 자조적인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검은 개’가 세계대전이라는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불안감과 죄책감으로부터 처칠 자신을 벗어나게 해줄 하나의 묘안이 되어 주었던 것은 아닐까.

모든 게 실패할 것만 같고 모든 게 자책스러운 당신 역시 스스로 환골탈태하여 완전무결한 새 사람으로 거듭날 필요는 없다. 그럴 수도 없고 말이다. 다만, 당신의 오른쪽 어깨를 뻐근하게 짓누르며 내려앉은 그 괴물 석상의 목소리부터 먼저 무시하려고 노력해 보자.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결과적으로 그 괴물 석상을 쫓아낼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한결 가벼운 몸짓으로 도약하며 세상에 맞설 수 있을 것이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전문의 홈 가기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선생님처럼 많은 사람을 도와주고 용기를 줄 수 있는 직업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힘을 많이 얻습니다. 정성스런 상담 너무 감사드립니다."
    "저 자신에게 궁금했던 질문에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