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통해 북한 병사가 귀순했다. 귀순 과정에서 팔꿈치와 어깨, 복부 등 다섯 군데의 총상을 입었다. 의식이 없던 이 병사는 수원 아주대학교 병원 중증외상센터로 이송되었다. 판문점에서 수원까지, 서울을 가로지르면서까지 아주대학교 병원으로 간 이유는 단 하나이다. 그곳에 이국종 교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국종 교수는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된 석해균 선장을 치료해 ‘아덴만의 영웅’으로 불렸다. 이 일을 계기로 ‘중증외상센터 설립을 위한 응급의료법 개정안’이 만들어졌으며, 곧이어 권역외상센터가 전국에 설립되었다. 이전이라면 골든 타임 밖으로 내팽겨졌을 외상 환자들은, 권역외상센터 덕분에 다시 삶을 얻게 되었다.

 

사진_픽사베이

 

‘쇼닥터 이국종’

한 익명 의사커뮤니티에서 일부 의사들은 그를 일명 ‘쇼닥터’라고 불렀다. 이국종 자신과, 아주대학교 병원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의학적으로 큰 성과가 아닌 것을 부풀려 말한다는 것이다. 비열한 비난이다. 하지만, 그 비난 속에 담긴 의료계의 현실은 서글펐다.

 

석해균 선장 이전의 이국종 교수의 의술과, 이후의 이국종 교수의 의술이 다를까? 혹은 환자에 대한 헌신도가 차이가 날까? 그렇지 않다. 석선장 이전의 이국종 교수는, 설령 그가 우주 최고로 헌신하는 의사 상을 받았더라도, 우리는 그의 이름을 지방 뉴스 자막으로나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덴만의 영웅이 된 그의 활약은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국민들의 지지를 토대로 ‘중증외상센터 설립을 위한 응급의료법 개정안’이 만들어졌다. 한 의사의 가치가 그가 한 시술이 의학적으로 얼마나 가치가 있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맡은 역할이 얼마나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는지에 따라 그의 가치가 결정된 것이다. 이국종 교수보다 환자에게 헌신하는 의사는 분명히 우리 곁에 있다. 가장 쉬운 예로, 우리나라에는 일주일에 100 시간 이상 근무하는 의사들이 수천명이나 있다. 바로 전공의들이다. 근무 시간으로는 더 큰 헌신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들의 헌신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그들을 존경하는 사람도 없다. 이런 이유로 분명 어떤 이는 속이 쓰릴 수도 있다. 국민이 이국종 교수를 선택한 것이, 의학적 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열한 비난이지만, 더 이상 순수 의학으로만은 존경받을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하기에 서글펐다.

 

외상 분야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분야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처한 위험을 과소평가한다. 즉, 자신에게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와 관련된 것에 관심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의 표가 필요한 정치인 역시 외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정치인이 관심이 없기 때문에, 정책적 지원도 없다. 정책적 지원이 없기 때문에, 외상 분야에 대해 투자를 해도 병원은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이 없다. 그래서 병원도 관심이 없다. 병원이 관심이 없으면 일자리가 생기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의사도 관심이 없다. 이국종 교수처럼 특이한 사람이 아니라면.

 

하지만 중증외상센터는 필요했다. 이국종 교수가 아덴만의 영웅이기 전에도. 중증외상센터가 이 나라에 생기기 위해서는 실제적인 필요성 이외의 무언가가 더 필요했다. 바로 이슈가 되는 것이다. 투표권이 없는 아동과, 투표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장애인에 관한 의료 정책 같이,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의료 분야는, 이슈가 되지 않으면 논의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국내 의료에 반드시 필요한 정책이라도, 누군가가 쇼닥터가 되어야만 실현 할 수 있었다. 이런 현실이 서글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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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종 교수는 영웅이자 쇼닥터이다.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단어가 어울리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그의 쇼가 의학적 정도를 벗어나지 않고, 중증외상 응급의료의 발전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발전은 우리 모두를 골든 타임 안에서 생활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면에서, 그의 변하지 않는 쇼는 박수 받아 마땅하다.

 

한 정치인이 이국종 교수가 귀순 북한군의 기생충, 분변, 옥수수를 공개했다는 이유로 맹비난 쇼를 했다. 물론, 이국종 교수가 환자의 동의 없이 기생충 등을 공개한 것은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 이국종 교수의 말대로 의료진에게 환자 인권은, ‘목숨을 구하는 일’이다. 하지만, 환자에게 덜 모욕적인 방법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비난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 정치인은 잘못된 타이밍과 방법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환자의 인권과 안정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적어도 환자가 이국종 교수를 떠날 수 있는 상태가 된 이후에 이 문제를 제기했어야 한다. 환자의 안전과 생존이 보장되어야, 인권이 의미 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현 시점에서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의 발목을 잡으려 했다는 점에서도, 그가 기획한 이 쇼는 오히려 공공의 이득을 저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대가로 이 정치인의 쇼는 혹독한 비난을 받고 있다. 그가 의도한 것이 무엇이든,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으나, 그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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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종 교수도, 저 정치인도 쇼를 한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저자도, 또 독자들도 모두 각자의 삶에서 쇼를 하고 있다. 우리의 모든 순간은 불완전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성공하려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상사가 싫을 때마다, 뒤통수를 때릴 수는 없지 않은가. 아픈 자식의 간병이 힘들 때마다, 눈물을 흘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기에 우리는 쇼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쇼를 한다는 사실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쇼의 목표가 무엇인지 살펴라. 그러면 당신은 또 다른 영웅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당신이 영웅일 수도 있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오늘 나는 어떤 쇼를 하고 있으며, 그 쇼는 무엇이 목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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